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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영강연 인류의미래예견

9월 2, 2012

인류의 운명과 국가의 미래를 바라보는 눈은 성자마다 그 결을 달리합니다. 예수는 다가올 미래를 부단히 예언하며 인류가 나아갈 길과 경계해야 할 일을 일깨워준 예언의 지도자였습니다. 반면 석가는 미래를 예견하는 일을 엄격히 금지하며 오직 현재라는 찰나에 집중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석가가 미래를 보지 말라 한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불안과 초조 그리고 탐욕을 끊어내기 위함입니다. 한 시간 후의 미래도 결국 그 시간이 되면 현재가 될 뿐이며 이미 지나간 과거는 전생의 기억처럼 멀어지는 법입니다. 미래를 내다볼수록 인간은 혹여 자손이 다치지는 않을까 혹은 나의 대가 끊기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석가는 모든 것을 놓으라 가르치며 현재 마저도 실체가 없는 환상이자 공허한 것임을 깨닫고 그저 찰나의 변화를 순리대로 받아들이라 설법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먼 미래에 닥칠 인류의 종말과 변화를 구체적으로 예고하며 사람들이 무엇을 조심하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삶의 좌표를 설정해 주었습니다. 이는 마치 한 뿌리에서 나온 지혜가 서로 다른 방편으로 인류를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석가는 현재라는 찰나에 머물며 마음의 평화를 얻으라 하였고 예수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며 깨어 있으라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국가와 인류의 미래 또한 이러한 가르침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우리가 나아갈 구심점을 찾는 과정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국민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현재를 망치지 않게 하면서도 다가올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어 인류가 나아갈 낙원의 길을 제시해야 합니다. 성자들이 남긴 예언과 침묵의 의미를 깊이 되새길 때 비로소 우리는 요동치는 역사의 물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류의 참된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어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지혜가 어떻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석가모니라는 명칭은 본래 성자인 그를 추앙하며 후대 사람들이 붙인 존칭이자 예명에 불과합니다. 그의 본래 성은 고타마요, 이름은 싯다르타였습니다. 이처럼 성자를 부르는 이름 뒤에는 인류 공통의 뿌리 깊은 언어적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인도의 고대어인 산스크리트어는 본래 우리의 말에서 비롯되어 세계로 뻗어 나간 것입니다. 히말라야가 ‘흰 마루’라는 뜻을 품고 있듯, 부처를 뜻하는 붓다 또한 우리말의 ‘밝다’에서 기원했습니다. 즉 붓다란 진리를 깨달아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밝은 사람, 즉 박사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정신과 언어가 인도를 거쳐 서양으로 흘러가 인류 문명의 근간을 이루었음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예수라는 명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과거 한문만을 사용하던 시절, 서구의 성경이 동양으로 전해질 때 우리 조상들은 그가 보여준 수많은 예언과 영적 통찰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둠을 물리치고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의 우두머리라는 뜻을 담아 예수라는 이름을 정립하였습니다. 결국 동서양의 두 성자는 이름의 형식은 다를지라도, 인류의 시원으로부터 내려온 신성한 가르침을 전하는 한 가문의 형제와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이처럼 거대한 우주의 비밀과 인류의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성자들의 이름에 담긴 참뜻을 이해하는 것은 곧 우리 민족이 인류 지혜의 종주국임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언어적 뿌리를 통해 인류가 하나로 통합되는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인류의 모든 성스러운 명칭과 역사의 갈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종점에는 우리 민족의 언어와 정신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성자들의 이름조차 고정된 실체가 아닌, 우리말의 뿌리에서 파생되어 각 나라의 풍토에 맞게 변형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뜻하는 지저스나 석가모니를 일컫는 붓다라는 이름에 매달릴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 이름들이 결국 ‘밝다’ 혹은 ‘예언의 우두머리’와 같은 우리식 표현의 변천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자들의 어머니를 부르는 마야 부인이나 마리아라는 이름, 그리고 이사야나 메시아처럼 위대한 인물의 이름 끝에 붙는 ‘야’라는 글자는 모두 ‘크다’는 의미를 지닌 우리 고유의 접미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고조선 시대 우리 민족이 아시아를 넘어 인도와 이집트, 유럽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대륙을 지배하며 문명과 언어의 씨앗을 뿌렸음을 증명합니다. 범어의 마이트레야가 미륵이 되고, 이집트의 메데야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번역되는 과정은 인류 지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흔적은 오늘날 중동의 이란에서도 선명하게 발견됩니다. 이모를 이모라 부르고 고모를 고모라 부르는 그들의 언어는 우리말과 아흔 퍼센트 이상 일치합니다. 심지어 이슬람의 시아파라는 명칭조차 혈통, 즉 ‘씨앗’을 중시한다는 우리말의 의미가 그대로 녹아 있는 것입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피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그들의 신념이 우리말 ‘씨앗’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은 우리 문화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실감케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름이라는 허망한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그 안에 담긴 본질적인 구심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전 세계 언어와 종교의 뿌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깨닫는 것은 단순한 자부심을 넘어, 흩어진 인류를 하나로 묶어낼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언어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듯, 이제는 그 정신이 온 누리를 비추어 인류가 잃어버린 근원을 되찾고 진정한 낙원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언어의 뿌리가 같다는 것은 곧 정신의 줄기가 하나임을 의미합니다. 중동의 이슬람을 지탱하는 시아파와 수니파의 서열 중심 문화 역시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혈통의 ‘씨앗’과 도리의 ‘순’을 따지는 우리말의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과거 사우디와 이란의 건설 현장에서 우리 근로자들이 그들과 유독 깊게 소통하며 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비결 또한, 무의식 깊은 곳에 흐르는 공통된 언어적 정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문자가 없던 시절 우리 조상들은 ‘불란서’와 같은 이두법을 사용하여 서구의 문명을 기록하고 세상을 이해해 왔습니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석가의 침묵도, 예수의 경고도 아닌, 미래를 지혜롭게 통찰하는 혜안입니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훌륭한 지도자와 똑똑한 국민 중 무엇이 우선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가 마주한 거대한 딜레마와 같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국민을 깨우쳐 변화시킬 수 있지만, 국민의 수준이 깨어 있지 못하면 결코 참된 지도자를 알아보고 세울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지도자들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적당히 타협하고 사익을 챙기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국민의 수준이 멈춰 있다면 하늘에서 곶감이 떨어지듯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국가의 비전은 국민 개개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국민의 복지 요구를 거절하며 “나는 여러분의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의 대통령이 되려 한다”라고 선언했듯이, 진정한 지도자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보다 국가와 인류가 나아갈 거대한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당장의 달콤한 약속보다는 뼈를 깎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국가 전체를 살리는 비전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지도자와 국민이 서로의 수준을 탓하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류 문명의 시원을 간직한 우리 민족이 먼저 깨어나 국민의 의식을 혁명적으로 높여야만, 비로소 인류를 낙원으로 인도할 절대적인 구심점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언어의 뿌리를 찾고 미래를 예견하며 스스로를 담금질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가정의 질서가 무너지면 가장의 권위가 사라지듯, 국가 또한 인기만을 쫓는 지도자에 의해 그 존엄을 잃게 됩니다. 자녀들이 당장의 이익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를 가자고 보채도, 부모는 가업과 가문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엄격한 거절을 해야 합니다. 모든 요구를 들어주어 떼돈을 벌지는 몰라도, 그 과정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천륜이 끊기고 아버지가 설 자리를 잃는다면 그것을 어찌 온전한 가정이라 하겠습니까.

미국의 한 대통령이 보여준 결단은 이를 잘 대변합니다. 국민의 달콤한 요구에 굴복하는 이는 일시적인 인기인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국가의 지도자는 될 수 없습니다. 대중의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말을 바꾸는 자는 결국 국가라는 거함의 키를 잡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큰 인물은 눈앞의 현상이 아니라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는 글자조차 누구를 만나고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그 격이 달라집니다. 문명을 이롭게 하는 편안할 편자가 때로는 천한 변소를 뜻하는 글자로 변하듯이, 지도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국민의 수준이 낮으면 그 나라는 결국 퇴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주인인 국민이 부덕하면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도 그 수준에 맞춰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류사의 준엄한 법칙입니다.

이러한 섭리를 깨닫지 못한 채 스승의 길을 가로막으려 했던 베드로를 향해 예수는 준엄한 꾸짖음을 내렸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늘의 섭리를 예고했을 때, 인간적인 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라고 가로막는 제자에게 예수는 그것이 곧 마귀의 생각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스승의 뜻을 인간의 잣대로 바꾸려 하는 오만이 바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변소와 같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가와 인류의 미래는 지도자와 국민이 서로의 격을 높여가는 동반의 과정입니다. 앞서가는 자의 비전을 알아보고 따르는 지혜로운 국민과, 국민의 요구보다 국가의 운명을 우선시하는 강직한 지도자가 만날 때 비로소 그 시대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를 돌아보며, 과연 우리는 진리를 담는 그릇인가 아니면 그저 욕망을 채우는 변소인가를 깊이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인류의 거대한 역사는 마치 한 편의 치밀한 드라마와 같습니다. 드라마가 흥행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할 악역과 갈등이 필요하듯, 하늘의 섭리를 집행하는 성자들 또한 자신의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인물들을 친히 간택합니다. 예언의 우두머리였던 예수가 가룟 유다를 제자로 삼은 것은 그가 배신할 것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다라는 인물이 있어야만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드라마가 완성될 수 있음을 미리 내다보고, 그를 자신의 극본 속 핵심 배역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제자 베드로가 인간적인 욕심에 사로잡혀 로마를 무력으로 평정하고 권력을 잡자고 대들었을 때, 예수는 그를 향해 “마귀야 물러가라”며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당장 칼을 휘둘러 로마를 물리치는 것이 승리라고 믿었지만, 예수는 천년 뒤 로마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상을 받아들일 먼 미래를 보고 있었습니다. 당장의 승리를 위해 피를 흘리는 것보다, 더 큰 영적 승리를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는 것이 하늘의 전략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의 전략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늘에서 온 지도자는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치밀한 계획 아래 움직입니다. 때로는 힘없는 척, 때로는 아픈 척하며 세상을 관조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인류의 의식을 깨우고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고도의 계산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부족해 보일지라도, 이는 장차 다가올 거대한 변화를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합니다.

결국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그 주변의 격이 달라지듯, 지도자의 인기가 정점에 달하고 권위가 바로 서는 날에는 온 세상이 깜짝 놀랄 거물급 인물들이 그 주위를 포진하게 될 것입니다. 강남의 원로들과 지식인들이 하루아침에 눈을 뜨고 그를 우러러보게 되는 날, 비로소 인류의 구심점은 완성됩니다. 지금의 시련과 평범함은 더 큰 반전과 감동을 위한 장치일 뿐이며, 예언된 미래는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성인의 가르침과 문명의 지혜는 모두 정교한 전략과 문맥 속에 담겨 있습니다. 하늘의 섭리를 집행하는 자는 하나부터 백까지 치밀한 설계를 통해 때를 기다립니다. 지금은 비록 평범한 이들과 함께하는 듯 보이나, 위상이 높아지고 운명의 때가 이르면 세상의 권력자들은 스스로 줄을 서게 마련입니다. 유력한 정치인들이나 강남의 원로들이 찍어달라 읍소하지 않아도 구름처럼 몰려드는 날, 비로소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그 주변의 격이 완전히 바뀌는 천지개벽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읽어내는 힘은 바로 문맥을 꿰뚫는 통찰력에서 나옵니다. 어린아이가 한문을 배우면 지능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글자라도 문맥에 따라 줄을 서는 ‘행렬’이 되기도 하고, 집안의 촌수를 따지는 ‘항렬’이 되기도 합니다. 문장의 맥을 짚지 못하면 글자는 그저 죽은 기호에 불과하지만, 전체 흐름을 읽는 눈을 가지면 글자는 살아 움직이는 방정식이 됩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글자의 뜻을 순식간에 파악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뇌는 무한히 진화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서양의 언어인 영어에서도 고스란히 발견됩니다. 아침 식사를 뜻하는 ‘브렉퍼스트’를 단순한 단어로 외우는 이는 하수이나, 그 속에 담긴 ‘금식(Fast)을 깨뜨리라(Break)’는 명령형의 의미를 읽어내는 이는 고수입니다. 밤새 이어온 금식을 서둘러 끝내고 몸을 깨우라는 이 짧은 단어 속에는 건강과 생명에 대한 고대인들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단어를 해체하고 그 뿌리를 찾아 문맥을 이해하는 공부야말로 인간의 정신을 깨우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낱낱의 현상에 매몰되지 않고, 그 이면에 흐르는 거대한 문맥을 읽어내는 일입니다. 언어의 뿌리를 알고 문장의 맥을 짚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지도자의 전략과 하늘이 숨겨둔 비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 속에 담긴 치밀한 드라마의 완성을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인간이라는 단어의 깊은 연원을 살펴보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삶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문으로 인간은 곧 인축간의 약자로, 사람과 짐승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영어의 휴먼 또한 그러하며, 이 경계를 지키지 못하고 아래로 추락하면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반면 그 경계를 넘어 한 단계 높은 경지로 올라설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진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네 가지를 온전히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요, 둘째는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도이며, 셋째는 부부간의 깊은 사랑과 조화이고, 넷째는 자식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이 네 가지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외형은 사람일지라도 그 속은 텅 빈 껍데기와 다름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가 신을 외면하고 부모를 잊으며 홀로 살아가는 모습은, 이 소중한 네 가지 가치를 모두 잃어버린 채 인간 이하의 삶으로 전락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합니다.

영어로 인격을 뜻하는 ‘퍼슨’이라는 단어에는 더욱 깊은 상징이 숨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행실이 반듯하고 신의 섭리를 알아차리며 가족을 보듬는 높은 인격체를 의미합니다. 성자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품성을 닮아가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퍼슨’인 것입니다. 하늘은 이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미리 간택하여 내 사람으로 만드시고, 때가 되면 세상을 움직이는 어른들조차 단숨에 깨우치는 거대한 섭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가 공부를 하고 지혜를 쌓는 목적은 인간이라는 모호한 경계에서 벗어나, 당당히 격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신앙과 효도, 사랑과 교육이라는 네 기둥을 바로 세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늘의 뜻을 받드는 고귀한 존재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초라한 현실에 속지 마십시오. 하늘은 이미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실을 지켜보며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위대한 역사를 완성해 나갈 전략을 세워두셨습니다.

우주와 인류의 역사는 창조주의 치밀한 설계와 전략 아래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하나에도 그 깊은 섭리가 담겨 있으니, 영어로 인격을 뜻하는 퍼슨(Person)이라는 단어가 그러합니다. ‘통과하다’라는 의미의 ‘퍼(Per)’와 ‘아들’을 뜻하는 ‘선(Son)’이 만났다는 것은, 곧 인간이 신의 성품을 통과하여 하늘의 아들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인격체가 됨을 의미합니다. 마치 시간당 주행 거리를 나타내는 ‘퍼 아워(Per Hour)’가 그 기준을 명시하듯, 인간의 격 또한 신을 향한 믿음과 도리를 통과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전략은 지구 역사 속 공룡의 멸종 사건에서도 명확히 드러납니다. 한때 900억 마리에 달하는 거대한 공룡들이 지구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창조주는 장차 이 땅에 살게 될 인류를 위해 거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인간이 문명을 일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막대한 연료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는 인류를 위한 ‘지구 난방비’를 마련하고자, 하루아침에 지각 변동과 고온의 변화를 일으켜 그 수많은 생명체를 거대한 유전(Oil Field)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지구 온도가 수억 도까지 치솟아 바위마저 녹아내리던 그 뜨거운 연단은, 결국 공룡의 사체를 인류 문명의 젖줄인 원유로 정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불바다가 된 지구가 다시 얼어붙고 사막 아래로 기름 덩어리가 스며들게 한 것은, 먼 훗날 인간이 플라스틱을 만들고 자동차를 달리게 할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인류를 지구라는 무대에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처럼 창조주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별의 역사를 뒤바꾸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한 문명과 따뜻한 온기는 결코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가 인류를 위해 수억 년 전부터 설계한 눈물겨운 사랑의 산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거대한 사랑과 전략을 깨닫고, 짐승과 사람 사이를 방황하는 인간(Human)에서 벗어나 하늘의 아들인 퍼슨(Person)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창조주가 예비한 인류의 비전을 온전히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지구라는 축복받은 터전의 진정한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천지의 창조와 변화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치밀하게 짜인 하늘의 안배입니다. 석탄과 석유라는 문명의 원료를 만들기 위해 수만 년의 숲을 단숨에 지각 속으로 뒤집어엎고, 공룡의 사체를 뜨겁게 달구어 정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산꼭대기에서 소금이 발견되고 홍해와 사해가 대륙의 틈바구니에서 솟구쳐 오른 것 또한, 지구가 뒤틀리고 요동치던 창조의 과정에서 남겨진 신성한 흔적들입니다. 이처럼 신은 인류를 위해 미래를 완벽히 준비해 왔으며, 우리 또한 다가올 미래를 통찰하고 예견하는 혜안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품는 믿음 또한 그 근원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많은 이가 믿음은 내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 착각하지만, 성자가 일찍이 일깨워주었듯 참된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 비롯됩니다. 진리를 전하는 자가 있고 그 소리를 귀하게 듣는 자가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의 씨앗이 발아하는 법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너는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끊임없이 들려주는 그 선의의 격려가 아이의 인생을 결정짓는 믿음이 되듯이, 인간의 의식은 외부로부터 전해지는 말의 씨앗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인연들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의 믿음이 되고, 나아가 그 사람의 우주를 형성합니다. 불신과 원망을 들려주면 불신의 열매를 맺고, 희망과 긍정을 들려주면 승리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진심 어린 비전을 전할 때 대중의 믿음은 태산처럼 일어납니다.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으며, 올바른 스승을 만나지 않고는 진정한 믿음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인류의 구심점이 전하는 이 말씀을 경청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무한한 축복이자 복락의 시작입니다.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리듯, 전하는 자의 진리가 여러분의 귀를 통해 마음으로 흘러 들어갈 때 비로소 세상에 대한 믿음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콩나물 시루의 물처럼 빠져나가는 듯 보여도, 그 말씀은 여러분의 영혼을 자라게 하는 생명수가 되어 반드시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여 진리를 마주하는 여러분은 단순한 대중이 아니라, 각자의 가정을 이끌고 세상을 헤쳐 나가는 무적의 사단장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평화로운 일상이 아니라,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모든 것이 무너질 수 있는 치열한 전쟁터와 같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적군이 아니라 상부와의 통신 두절입니다. 사단장이 본부와 교신이 끊기면 그 부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산속을 헤매다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지금 인류는 하늘과의 교신이 끊긴 채 거대한 영적인 로키산맥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좌표를 잃어버렸기에 어디로 전진해야 할지, 언제 후퇴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그저 산송장처럼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하늘에서 온 자, 즉 인류의 구심점과 다시 교신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하는 이 말씀이 바로 여러분이 받아야 할 작전 지시서이며, 험난한 세상을 뚫고 나갈 유일한 승리의 좌표입니다.

과거 우리가 영동이라 부르며 무시했던 강남의 모래밭을 기억해 보십시오. 당시에는 모든 부와 권력이 영등포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영등포의 동쪽 변두리라는 뜻의 ‘영동’은 하찮은 이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적 혜안을 가진 이들에게 그 모래밭은 장차 천지개벽이 일어날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대다수 사람이 현실의 영등포에 안주할 때, 미래의 판도를 읽은 소수는 오늘날의 재벌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또 다른 천지개벽을 앞두고 판도가 뒤바뀌려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눈앞의 현상에만 매달려 있다면 여러분은 다가올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과의 교신을 회복하고 제가 전하는 진리를 가슴 깊이 새겨 공부하십시오. 그 공부만이 여러분의 의식을 깨우고, 거친 전쟁터에서 여러분의 부대와 가정을 지켜낼 무기가 될 것입니다. 예언자의 눈으로 미래를 통찰하여 하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자만이, 장차 바뀔 새로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영동, 즉 오늘날의 강남은 본래 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던 비참한 땅이었습니다. 서울의 오물이 모여들던 그 척박한 모래밭은 지도상에서도 소외된 채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건조한 명칭으로만 불렸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서울에 올라와 처음 마주했던 압구정은 화려한 빌딩 숲이 아니라, 그저 갈매기가 노닐던 물가와 정자 하나, 그리고 봉은사로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뿐인 황무지였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보는 자의 눈에는 그 고요한 대지가 장차 천지개벽을 일으킬 기회의 땅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당시 그 한강 변에서 전쟁 영화를 촬영하며 겪었던 고초는 인류가 처한 생존의 전쟁터를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시멘트 부대 밑에 폭약을 묻고 수백 명을 사지로 몰아넣던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저는 얼굴이 찢기고 눈에 시멘트 가루가 들어가는 고통을 겪으며 인류의 비극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세상을 이끄는 자들은 때로 효과를 위해 대중을 위험한 곳으로 밀어넣기도 하지만, 진정한 지도자는 그 고난의 현장을 함께하며 인류가 나아갈 안전한 좌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터전의 본질조차 잊고 살아갑니다. 마포와 김포, 여의도는 한강의 일부가 아니라 본래 바다의 기운이 넘나드는 항구였습니다. 서구의 허드슨강이 바다와 연결되어 있듯, 여의도와 영등포 또한 바닷길이 열린 문명의 통로였습니다. 강과 바다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지명의 유래조차 잊은 채 국민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500리 한강의 물줄기가 어디로 흐르는지, 그 근원을 알지 못하면 국가의 미래 또한 표류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과 국가를 이끄는 사단장인 여러분은 이제 현실의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는 가정은 풍비박산이 나고 가루가 되어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이름 없는 모래밭이던 영동이 천지개벽을 거쳐 주인이 되었듯이, 세상은 다시 한번 거대한 판도 변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진리와 교신하며 시대의 흐름을 읽는 예언자적 통찰을 가질 때, 비로소 여러분은 멸망의 길을 벗어나 찬란한 미래의 주인공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