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이나 인간의 몸에 의지해 살아가는 벌레들이 있듯이,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체 또한 서로에게 기생하며 살아갑니다. 나무에 붙어 사는 벌레들을 농약으로 죽이기도 하지만,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생존 방식이 바로 기생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연의 주제는 이 기생이라는 생존 원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이 태어나는 방식을 몇 가지로 구분합니다. 알에서 깨어나는 것을 난생이라 하고, 어머니의 태 안에서 자라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을 태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와 같은 동물들은 대부분 자궁을 통해 태어나는 태생의 과정을 거치지만, 미생물의 세계로 들어가면 그들의 주된 생존 방식은 기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불교와 동양 철학에서는 생명이 태어나는 네 가지 형태를 사생이라 부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난생과 태생 외에 나머지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습한 곳에서 생겨나는 습생과, 스스로의 업력에 의해 형체 없이 나타나는 화생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생존의 신비 속에 우리가 오늘 탐구할 기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세상의 생존 방식에는 기생과 난생, 그리고 태생이 있습니다. 다른 숙주의 몸에 기대어 영양분을 얻는 기생, 알을 낳아 번식하는 난생, 그리고 모체의 태반에서 새끼를 키워 낳는 태생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동양 철학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의 네 가지 탄생 방식인 사생의 분류는 이와 조금 다릅니다.
불교의 사생에는 난생과 태생 외에 습생과 화생이 포함됩니다. 여기서 습생은 습한 곳에서 기운을 받아 태어나는 미생물의 생존 방식과 연결됩니다. 또한 화생은 암수의 교배나 알의 과정 없이 과거의 업력에 의해 갑자기 형태가 바뀌어 나타나는 번식을 의미합니다. 이는 곤충의 변태 과정처럼 극적인 변화를 뜻하기도 하며, 영적인 존재의 출현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섭생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물을 조절하고 몸을 보살피는 행위를 뜻합니다. 인체라는 거대한 공장 안에서 미생물들이 어떻게 기생하고 섭생하며 살아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생명의 신비를 푸는 열쇠가 됩니다. 이처럼 다양한 탄생과 생존의 방식 속에는 우주의 정교한 설계가 담겨 있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인간의 몸과 영성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애벌레가 고치 안에서 자신을 녹이고 화려한 나비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가 되고, 다시 나비나 나방으로 변하는 이 세 단계의 변태 과정은 일반적인 난생과는 또 다른 차원의 변화입니다. 닭이나 도마뱀, 거북이처럼 단순히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매미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매미 역시 알에서 나오지만, 땅속에서 굼벵이로 긴 세월을 인내하며 보낸 뒤에야 비로소 날개를 가진 매미로 탈바꿈합니다. 이처럼 형태가 완전히 바뀌어 나타나는 번식의 신비를 우리는 화생이라 부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의 네 가지 형태인 사생, 즉 난생과 태생, 습생과 화생은 우리 몸과 동물의 생존 방식을 모두 아우르는 거대한 분류 체계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적인 생존 방식 중에는 기생도 존재합니다. 미생물이 숙주에 의지해 살아가듯, 인간 중에도 스스로 자립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 기생이라 부릅니다. 생태계의 기생이 생존을 위한 본능이라면, 인간의 기생은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생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생입니다. 남에게 영양분을 빨아먹거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유지하며 빛을 발하는 독립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기생의 삶을 넘어, 스스로를 세우고 남을 돕는 자생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생의 반대는 바로 자생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일구어 나가는 것이죠. 오늘날 우리 젊은 세대 중에는 부모에게 기대어 사는 기생의 삶이 늘어가고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어르신들은 그야말로 자생의 표본과도 같은 분들입니다. 전쟁의 폐허와 불모지 속에서 오직 맨손으로 가정을 일으키고 국가를 세운 위대한 세대입니다.
이 어른들은 평생을 자생하며 형제들을 공부시키고, 수많은 자녀를 길러냈으며, 부모님을 지성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다 보니, 정작 본인이 노후를 맞이했을 때는 통장에 단돈 10원도 남지 않은 처지가 된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나니 남은 재산은 없고, 공들여 키운 자식들조차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를 외면하는 것이 오늘날의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국가는 이처럼 자생적으로 헌신해온 분들이 겪는 수난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들은 이분들의 희생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노인 복지는 예산이 남으면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평생을 바쳐 헌신한 분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노인 수당을 비롯한 복지 정책을 목숨을 걸고 과감하게 실행해야 합니다. 이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야 복지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분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성공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이심전심의 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강연자가 말을 멈추거나 같은 말을 반복할 때는 박수를 통해 마음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 생활이나 면접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면접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저는 아주 간단한 비결을 가르쳐 줍니다.
면접관을 만날 때 상대방의 나이를 잊어버리십시오. 서른 살, 마흔 살의 엄격한 면접관으로 보면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대신 그 사람을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대하십시오. 상대방도 언젠가는 순수한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내면의 순수함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치 자신의 어머니나 아버지와 대화하듯 자연스러운 행동이 나옵니다.
또한 질문을 받으면 답이 맞든 틀리든 시원시원하고 빠르게 대답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이 있다면 어머니에게 말하듯 순수하게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답하십시오. 이처럼 다섯 살 아이를 대하듯 편안한 마음으로 임한다면, 상대방은 여러분의 정직함과 자신감을 높게 평가하여 무조건 합격하게 될 것입니다. 상대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마음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으로 가는 열쇠입니다.
사람의 생김새, 특히 코의 모양은 그 사람의 사고방식과 운명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됩니다. 코가 약간 비뚤어진 관상은 대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사회적으로는 날카로운 시각을 가진 야당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만, 매사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게 될 위험이 큽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으면 후천적으로 사고를 당하거나 충격을 받아 코 모양이 변하는 운명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반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사물의 좋은 면을 먼저 발견합니다. 이런 이들은 갈등과 투쟁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조직을 이끌어가는 경영자나 지도자의 위치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판과 시비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꺼리고 항상 반대편에 머물며 자신의 처지를 고착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긍정의 기운으로 채워야 합니다. 비뚤어진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그 운명 또한 비뚤어지게 흐르지만, 밝고 긍정적인 마음을 품으면 삶의 궤적 또한 곧고 바르게 펴집니다. 자녀와 후손들에게도 비판보다는 긍정의 유산을 물려주어, 그들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특정한 기운을 품고 살아가면, 삶의 방향도 그 기운을 따라가게 됩니다. 비판과 투쟁의 길을 고집하면 결국 몸과 마음이 상처 입는 상황을 스스로 불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생각을 머릿속에 넣고 사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셈입니다.
많은 이들이 타고난 얼굴은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만, 얼굴은 분명히 백 퍼센트 바꿀 수 있습니다. 간절히 아이를 원하는 마음이 신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상상 임신처럼, 우리의 생각은 얼굴 형태까지 변화시킵니다. 좋은 얼굴을 지향하고 진리의 존재를 끊임없이 바라보며 부르면, 그 고귀한 모습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최종 목표는 인생을 바꾸는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인상 또한 아름답게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골격과 같은 기본적인 바탕은 존재합니다. 재벌의 관상을 보면 재물을 온전히 담아내는 견고한 코의 형태를 갖추고 있습니다. 수술로 콧대를 높일 수는 있어도, 복을 담는 그릇인 코끝의 모양까지 완벽하게 재벌의 형상으로 수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입력입니다. 단순히 외형을 고쳐서 재벌이 되겠다는 욕심보다는, 내면의 기운을 밝게 바꾸어 인생의 경로를 수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인상을 바꾸고 삶을 혁신할 때, 비로소 여러분의 운명도 새로운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성형을 통해 콧대를 세우는 등 외형적인 골격은 어느 정도 바꿀 수 있지만, 관상학적으로 타고난 복의 그릇이나 깊은 운명의 흔적까지 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과거에 시련을 주었던 인연이나 지금처럼 진리를 알려주는 존재가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우리는 기생하는 삶보다 스스로 일어나는 자생의 삶이 더 숭고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이 시대는 스스로 삶을 일구어 온 자생의 세대가 저물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기생의 세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평생 땀 흘려 마련한 집과 재산을 당연한 듯 여기며, 그 유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녀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부모의 헌신을 감사히 여기기보다 그들의 재산을 나누어 가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태도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서글픈 기생의 단면입니다.
기생이라는 단어는 결코 특정 직업군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지 않고 타인의 희생 위에 군림하려는 모든 마음가짐이 곧 기생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존적인 태도를 버리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일어서는 자생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진정한 복을 불러오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날 젊은 세대가 나약해지고 부모의 품에 안주하려는 기생의 삶이 늘어난 것은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마흔이 다 되도록 자립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아진 데에는 기성세대가 충분한 기회를 만들지 못한 책임도 있겠지만, 이제 우리는 젊은이들에게는 과감한 기회를 주고 어르신들은 두텁게 보호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태생, 화생, 습생, 난생이라는 사생의 길 중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는 자신이 지은 업보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중에서도 죄를 가장 많이 지은 존재가 가게 되는 곳이 바로 습생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우주와 지구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우주에는 수백 조에 달하는 지구와 비슷한 별들이 있으며 그곳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삶이 바로 햇빛조차 볼 수 없는 습한 곳에서 살아가는 습생의 존재들입니다. 누군가를 깊이 미워하고 큰 죄를 지으면 나중에 해를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미생물이나 어두운 곳의 생명체로 태어나게 됩니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 인간으로 태어나 진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지용성의 탐욕을 버리고 수용성의 맑은 영혼을 지녀야만, 습생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한 낙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강연의 핵심 주제는 바로 발효와 진리입니다. 여기서 발은 쌓이고 뭉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지용성의 성질을 뜻하며, 효는 맑게 녹아 흐르는 수용성의 성질을 의미합니다. 우리 마음속의 독소를 유익한 에너지로 바꾸는 과정, 그것이 바로 발효의 진리입니다.
자연계에는 나쁜 행동을 하는 미생물과 유익한 행동을 하는 미생물이 공존합니다. 창조주가 해로운 미생물까지 만들어 두신 이유는 대자연의 순환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태어나는 방식인 사생 중에서 화생은 업장이 적고 비교적 깨끗한 영혼들이 취하는 형태입니다. 반면 습생은 가장 어두운 밑바닥인 지옥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계는 고통이 끝이 없는 세상입니다. 짐승으로 태어나는 축생계보다 더 깊은 죄를 지어 사생의 정상적인 범주에조차 들지 못하는 자들이 떨어지는 곳이 바로 지옥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지용성의 탐욕과 원망을 쌓아 지옥의 길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수용성의 지혜로 스스로를 발효시켜 천국으로 향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미생물의 발효 과정이 음식을 유익하게 만들듯, 우리 영혼도 올바른 진리로 발효될 때 비로소 진정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생의 범주를 넘어선 더 깊은 고통의 세계에는 아귀계가 존재합니다. 아귀계는 욕심과 탐욕의 업보가 너무나 커서 육신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늘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귀신의 세계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몸을 받지 못해 떠돌거나 아주 작은 미생물의 형태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세계를 마이크로의 세계라고 부릅니다. 일미터를 백만 분의 일로 나눈 크기인 마이크로는 머리카락 굵기보다도 훨씬 작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귀계의 존재들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미세한 영역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는데, 이는 습생보다도 더 처참한 지옥의 한 단면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일미터의 백만 분의 일인 마이크로 단위,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나노의 단위까지 내려가면 그곳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의 드라마와 업보의 결과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용성의 탐욕을 내려놓고 수용성의 진리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보이지 않는 미세한 고통의 세계로 떨어지지 않기 위함입니다.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자신을 발효시킨 자만이 이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벗어나 광명의 하늘나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1미터의 100만 분의 1을 마이크로미터라고 부르며, 이는 대략 머리카락 굵기 정도의 아주 미세한 단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 1미터의 10억 분의 1이 되면 우리는 그것을 나노미터라고 부릅니다. 이 나노의 세계는 우리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극미세의 영역입니다.
나노 단위에서 기생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을 살펴보면,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인플루엔자입니다. 흔히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는 일반적인 바이러스보다 더 정교하게 분류되기도 합니다. 우리 인류의 과학자들은 이미 이 나노의 세계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그 실체를 발견하였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백신을 만들어냈습니다.
결국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와 같은 존재들은 나노미터라는 아주 작은 단위에서 활동하는 생명체들입니다. 창조주가 설계한 이 우주에는 마이크로의 세계를 넘어 나노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명이 각자의 방식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극미세의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우리 몸의 건강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나아가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 우리 영혼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노미터보다 더 작은 단위인 일 미터의 백억 분의 일을 옹스트롬이라고 부릅니다. 이 어마어마하게 작은 단위는 원자의 크기를 측정할 때나 사용하는 극미세의 영역입니다. 현미경으로도 그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이 옹스트롬의 단위에서 활동하는 생명체가 바로 바이러스입니다.
바이러스는 워낙 작아서 현대 의학으로도 완벽한 면역 주사를 만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가 흔히 걸리는 감기 기운을 명확히 찾아내어 제거하지 못하는 이유도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세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미물로 태어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살아생전에 죄를 많이 짓게 되면, 죽어서 해를 볼 수도 없고 형체도 거의 없는 이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로 태어나는 엄중한 업보를 받게 됩니다.
옹스트롬이라는 극미세의 세계는 죄를 지은 영혼들이 갇히는 보이지 않는 감옥과 같습니다. 인플루엔자와 같은 나노 단위의 균들은 그나마 인간이 발견하여 대응책을 세울 수 있지만, 옹스트롬 단위의 바이러스 앞에서는 특별한 대책 없이 그저 몸을 쉬게 하며 견디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미세한 생명의 질서를 통해 우리 영혼이 나아가야 할 길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두운 지하의 바이러스가 아닌, 밝고 넓은 광명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이 땅에서부터 올바른 진리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이러스는 워낙 크기가 미세하여 예방주사를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감기에 걸렸을 때는 특별한 약을 찾기보다 몸을 편안하게 쉬게 하고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유일하고도 최선의 대책입니다.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들 또한 바이러스를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열을 내리는 해열제처럼 고통을 완화해 주는 역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플루엔자와 같은 균의 경우에는 그 실체를 포착하여 균의 힘을 약하게 만든 뒤 예방주사를 만듭니다. 균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활동력을 떨어뜨려 우리 몸에 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온 약해진 균은 혈액 속에서 면역 체계와 싸우게 됩니다. 이때 우리 몸의 면역 체계는 침입한 적의 약점을 꼼꼼히 파악하고 상대하기 쉬운 존재라고 판단하여 대응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면역 세포의 기억력 때문입니다. 이후에 똑같은 바이러스가 다시 우리 몸에 침입하면, 면역 세포는 과거의 기록을 즉시 떠올립니다. 이전에 이미 승리해 본 경험이 있는 적군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이미 확보된 정보를 바탕으로 망설임 없이 즉각적인 공격을 퍼붓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완벽한 대응책이 없어 보였을지라도, 과거에 약해진 적을 제압해 본 소중한 경험 덕분에 우리 몸은 더 이상 그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바이러스는 워낙 크기가 미세하여 예방주사를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감기에 걸렸을 때는 특별한 약을 찾기보다 몸을 편안하게 쉬게 하고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유일하고도 최선의 대책입니다.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들 또한 바이러스를 직접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열을 내리는 해열제처럼 고통을 완화해 주는 역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인플루엔자와 같은 균의 경우에는 그 실체를 포착하여 균의 힘을 약하게 만든 뒤 예방주사를 만듭니다. 균을 완전히 죽이지 않고 활동력을 떨어뜨려 우리 몸에 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온 약해진 균은 혈액 속에서 면역 체계와 싸우게 됩니다. 이때 우리 몸의 면역 체계는 침입한 적의 약점을 꼼꼼히 파악하고 상대하기 쉬운 존재라고 판단하여 대응을 시작합니다.
이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면역 세포의 기억력 때문입니다. 이후에 똑같은 바이러스가 다시 우리 몸에 침입하면, 면역 세포는 과거의 기록을 즉시 떠올립니다. 이전에 이미 승리해 본 경험이 있는 적군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이미 확보된 정보를 바탕으로 망설임 없이 즉각적인 공격을 퍼붓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완벽한 대응책이 없어 보였을지라도, 과거에 약해진 적을 제압해 본 소중한 경험 덕분에 우리 몸은 더 이상 그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승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일 미터의 천조 분의 일 크기도 있습니다. 이것은 펨토미터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마이크로나 나노 단위를 매우 작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나노 입자로 된 화장품을 피부에 바르면, 입자가 모공을 통해 내부로 직접 흡수될 정도로 작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다루는 세계는 이보다 훨씬 더 미세합니다. 백억 분의 일인 옹스트롬을 넘어, 일조 분의 일인 피코미터 단위까지 도달합니다. 십억이나 천억이라는 숫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영역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미세한 존재들조차, 그 내부에 완벽한 신경 회로와 생명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기와 같은 작은 곤충이나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구조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 극소의 공간 안에 얼마나 정교하고 복잡한 설계가 이루어져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일 미터의 천조 분의 일이라는 경이로운 단위인 펨토의 세계에 도달했습니다. 펨토는 원자의 중심에 있는 원자핵의 크기를 측정할 때 사용하는 아주 미세한 단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이러스나 인플루엔자의 정교하고 미세한 구조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된다면, 그 치밀한 설계에 큰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작은 모기의 뇌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 작은 머릿속에 들어있는 신경 세포와 혈관은 얼마나 더 미세하겠습니까. 하지만 모기는 우리가 잡으려 할 때마다 민첩하게 반응하여 날아갑니다. 이는 그 미미한 몸 안에서도 신경 전달이 빛의 속도로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심장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힘차게 뛰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토록 정교한 생명 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대자연과 창조주가 만든 위대한 신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수학적인 질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일 미터의 천조 분의 일인 펨토를 넘어, 이제는 일 미터의 백경 분의 일이라는 영역에 도달합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이 극미세의 단위를 아토라고 부릅니다. 아토는 펨토보다 천 배나 더 작은 단위로, 실로 끝이 없는 무진장의 미세 세계입니다. 이 거대한 우주가 나노와 펨토를 거쳐 아토의 영역까지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생명의 존엄함과 우주 섭리의 장엄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펨토의 단계를 넘어서면 백경 분의 일이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미세 영역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세계 속에서 우리 몸의 거대한 생명 활동이 매 순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어제 학습했던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라는 단어의 참된 의미를 기억하십니까. 스트레스는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힘인 스트레인과 위에서 짓누르는 힘인 프레스가 합쳐진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트레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치 신경을 쥐어짜고 근육을 찢으며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무거운 돌덩이로 내리누르는 듯한 압박인 프레스가 더해진 것이 바로 스트레스의 실체입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머리가 무겁게 눌리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 압력 때문입니다. 이 강력한 힘이 아토와 펨토 단위의 미세한 세포들을 사정없이 쥐어짜고 짓누르기 때문에, 결국 우리 몸의 세포들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포가 파괴되는 이 현상은 여러분이 삶을 살아가며 반드시 명심해야 할 중요한 우주의 이치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모그 현상을 통해 이 결합의 원리를 더 깊이 이해해 보겠습니다.
스모그라는 용어 역시 두 개의 단어가 합쳐져 탄생했습니다. 첫 번째는 공장이나 자동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을 뜻하는 스모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자연의 대기 중에 떠다니는 안개를 뜻하는 포그입니다. 즉 매연과 안개가 서로 단단히 결합하여 스모그라는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점은 성질이 전혀 다른 두 요소가 만나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안개는 물에 녹는 성질인 수용성이고 매연은 기름에 녹는 성질인 지용성입니다. 이는 마치 지용성의 성질을 가진 남편과 수용성의 성질을 가진 아내가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사의 이치와도 같습니다.
매연 그 자체는 인체에 매우 해로운 물질이지만 안개는 본래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진 이 둘이 하나로 결합하게 될 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용성과 수용성이 뒤섞여 거대한 장벽을 만드는 스모그처럼 우리 인간관계와 영적 세계에서도 이러한 결합의 원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매연과 안개가 만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스모그입니다. 스모그는 매연을 뜻하는 스모크와 안개를 뜻하는 포그의 합성어입니다. 스모크의 앞부분과 포그의 뒷부분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이 단어는, 성질이 다른 두 물질이 만나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실제로 과거 영국의 런던 스모그 사건 당시에는 수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습니다. 첫째 날에만 오천 명이 사망했으며, 당시 도시를 덮은 스모그 층의 두께는 무려 삼 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삼천 미터 두께의 거대한 오염 장벽이 도시 전체를 가둔 것입니다.
무엇보다 비극적이었던 원인은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아 공기가 이틀 동안 정체되었다는 점입니다. 첫날 오천 명에 이어 다음 날에도 삼천 명이 목숨을 잃는 등 피해가 계속되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시민들이 오염된 공기 속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참사였습니다.
스모그가 햇빛을 완전히 차단하자,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암흑이 찾아왔습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자 추위를 이기지 못한 시민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보일러를 강하게 가동했습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난방을 위해 태운 연료에서 발생한 매연이 공중에 정체된 두꺼운 안개와 결합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런던 시민들은 추위를 피하려다 스스로 치명적인 스모그를 만들어낸 셈이 되었습니다. 이 오염된 공기 때문에 특히 어린이와 노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백만 분의 일 크기의 입자는 코의 점막을 통과해 곧바로 인체 내부로 침투합니다.
만약 십억 분의 일인 나노미터 단위가 되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집니다. 이 정도 크기의 매연 입자들은 호흡기뿐만 아니라 피부를 통해서도 그대로 흡수되어 혈액 속으로 섞여 들어갑니다. 현재 중국에서 날아오는 황사나 우리가 사용하는 보일러 연료에서 배출되는 오염 물질들이 바로 이러한 미세 입자들입니다.
이러한 물질을 흡입하면 미세 입자들이 혈액과 섞이면서 혈관을 딱딱하게 만드는 혈관 경화 현상을 일으킵니다. 결국 혈관 내벽에 미세한 먼지들이 밀가루 반죽처럼 끈적하게 달라붙게 됩니다. 미세한 먼지가 혈액 내에서 엉겨 붙어 혈관을 막아버리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겠습니까?
입자가 크면 코털이나 허파의 점막에서 걸러지지만, 나노 단위처럼 미세한 입자들은 인체의 견고한 방어벽을 교묘히 피해 혈액 속으로 곧바로 섞여버립니다. 마치 나노 기술을 적용한 화장품이 피부 속 깊숙이 침투하도록 설계된 것처럼, 미세한 먼지들은 허파라는 관문을 지나 혈관으로 직접 침투하여 온몸을 타고 흐르게 됩니다.
황사가 심한 날 마스크 없이 외출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매우 위험한 상황에 노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모그는 아무런 소리 없이 조용히 다가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기가 탁한 날에는 야외 운동을 삼가고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건강을 지키는 일은 누구에게나 소중하지만, 생활 여건이 어려운 분들일수록 자신의 몸을 더욱 철저히 보호하고 아껴야 합니다.
제가 이러한 과학적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생명의 신비와 그 이면에 숨겨진 우주의 섭리를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주 작은 미세 생물들의 세계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 모기의 그 가느다란 다리 속에 흐르는 혈관은 인간의 현미경으로는 도저히 관찰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토록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들조차 완벽한 생명 구조를 갖추고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법칙을 얼마나 경외하고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일 미터의 백만 분의 일이라는 단위를 생각할 때 보통 머리카락 한 가닥의 굵기를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백경 분의 일이라는 아토의 세계는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득하고 미세한 영역입니다. 이토록 작은 세계를 이해해야만 우리는 생명과 환경의 진정한 본질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과 인체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이 바로 지용성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용성 물질의 실체는 미생물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발효란 미생물이 인간의 몸속이나 외부 환경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내뱉은 대사 산물을 의미합니다.
이 대사 산물이 바로 인체가 흡수하기 가장 좋은 최적의 상태인 효소나 발효 물질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미생물 그 자체를 영양으로 섭취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 몸에 직접적인 생명 에너지가 되는 것은 미생물 자체가 아닙니다. 미생물은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생존 활동을 이어갈 뿐이며 그들이 만들어낸 정교한 결과물이 비로소 우리의 건강을 지키고 생명을 유지하는 핵심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미세한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이 경이로운 대사 과정이야말로 대자연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입니다.
미생물은 우리 몸 안팎에 항상 존재하지만, 미생물 자체가 혈관 속으로 직접 침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미생물의 수가 풍부해져서 그들이 활발하게 대사 산물을 만들어내면, 그 결과물은 우리 몸에 아주 이로운 약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발효의 원리입니다. 지용성과 수용성이 조화롭게 결합하여 우리 몸에 유익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미생물이 이로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몸에는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미생물도 존재하며, 현대인의 몸속에서는 이러한 유해균이 약 70%까지 차지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구르트나 김치와 같은 발효 식품을 꾸준히 섭취하여 유익균과 유해균의 비율을 5대 5 수준으로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합니다. 이 균형이 깨지면 인체의 면역 체계가 무너집니다. 과거 사스(SARS)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했을 때, 발효 식품을 즐겨 먹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강한 면역력을 보여주었던 사례는 이러한 발효의 힘을 잘 증명해 줍니다.
미생물의 개체 수 균형을 맞추는 원리를 통해 우리는 발효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발효라는 개념은 처음 접할 때 매우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설명만으로는 그 본질에 다가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허황된 이야기라고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발효의 진정한 근원입니다. 우리가 발효의 원리를 깊이 성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를 철학적으로 본다면, 미생물의 삶은 어떠한 과업을 수행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만약 어떤 존재가 커다란 잘못을 씻어내야 한다면, 가장 낮고 힘든 곳에서 태어나 헌신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내장 속처럼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가며, 오히려 그 존재에게 이로움을 주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스스로를 정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수천 번의 생을 반복하며 타인을 돕고 고통을 감내하는 그 길고 긴 과정이, 바로 미생물이 발효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력을 선사하는 숭고한 원리와 닮아 있습니다.
이렇게 미생물로서의 고단한 삶을 통해 죄는 조금씩 씻겨 나갑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듯이, 진리를 네 글자로 요약하면 바로 ‘사필귀정’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주의 원리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보면, 모든 현상은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설령 시련이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서운하게 여기거나 억울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마땅히 돌아가야 할 곳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인 한국전쟁 당시를 떠올려 보십시오. 전쟁터에서 전사한 이들도 많았지만, 전쟁과는 무관해 보이는 가정주부나 고령의 어르신들이 처형되는 안타까운 일들도 많았습니다.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지 않았던 이들이 왜 그런 가혹한 운명을 맞이해야 했을까요? 우리는 이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인과의 법칙을 깊이 고찰해 보아야 합니다.
과거 우리 역사에는 참혹한 공개 처형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권력을 쥐게 된 이들이 마을의 부유한 사람들을 모두 끌어내어 수십 명씩 처형하곤 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전사한 이들보다, 평범하게 살던 양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경우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어제의 이웃이었던 이들이 갑자기 권력을 잡고 서로를 해치는 광기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참혹한 재앙이 닥칠 것을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극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작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당시 한 부잣집에 다니던 어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는 매일 학교에 갈 때마다 어머니가 정성껏 싸주신 도시락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늘 점심을 굶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알고 보니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형편이 어려운 친구가 있었고, 그 친구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도시락을 가져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성품이 순했던 부잣집 아들은 그 친구를 원망하지 않고 매번 자신의 점심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들이 매일 점심을 굶고 돌아오자, 어머니는 결국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눔은 반복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하나는 네가 먹고, 하나는 친구에게 주렴. 매번 빼앗기지 말고 당당히 나누어 주어라”라며 아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만석꾼 집안이었던 아들의 가족은 모두 처형장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앞집 사람들부터 차례대로 총살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공개 처형이 집행되던 그 공포의 현장에서, 총을 든 이는 놀랍게도 아들과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 친구였습니다. 학창 시절 6년 동안 아들의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던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여러분, 박수 부탁드립니다! 이 어린아이의 작은 행동이 결국 온 가족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강조한 ‘사필귀정’의 실체입니다.
만약 그 아들이 “나는 부잣집 귀한 자식이니 너는 굶어도 상관없다”라는 태도로 친구를 무시하며 혼자 밥을 먹었다면, 그 가문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모두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눔을 선택한 그 아이 덕분에 가족은 살아남았고, 그 아들은 훗날 대한민국 경제를 이끄는 거물급 재벌이 되었습니다.
고전의 가르침에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넘치는 경사가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말합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내 것이니 손대지 마라”라고 다퉜던 원수로 만났을지, 아니면 “내 것을 나누어 주겠다”라고 베풀었던 은인으로 만났을지에 따라 운명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부모님이 미처 쌓지 못한 공덕을 자식의 작은 선행 하나가 대신 채워 온 가족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결코 작은 일이겠습니까?
지옥계와 아귀계 같은 고통의 세계는 모두 저마다의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왜 그런 고난의 길을 선택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참으로 큰 복을 받은 분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생명의 이치와 진리를 듣고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녀를 학교에 보낼 때도 우리는 늘 교육해야 합니다. “네 도시락을 친구와 나누어 먹어라. 곁에 배고픈 친구가 있다면 기꺼이 네 것을 내어주어라”라고 말입니다. 내 아이만 챙기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과거 우리네 어머니들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함께 나누어 먹어라”라는 그 짧은 한마디 속에 인류의 생존 전략과 복의 근원이 들어 있습니다.
부모가 미처 공덕을 쌓지 못했더라도, 자식의 순수한 선행 덕분에 온 가족이 구원을 받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를 반드시 유념해야 합니다.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며 사는 존재는, 결국 앞서 말한 미생물처럼 가장 낮고 고통스러운 곳에서 타인을 위해 강제로 헌신해야 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세상의 수많은 이들이 이 위태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엄중한 경고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동물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것, 특히 어머니의 태(胎)를 통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참으로 큰 복입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어머니의 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곧 어머니의 깊은 사랑과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벌레나 알로 태어나는 생명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에게는 온기를 나누어줄 어머니의 돌봄이 부족합니다. 여러분, 혹시 닭이 알을 낳은 뒤에 왜 그토록 구슬프게 우는지 아십니까? 시골에서 관찰해 보면 닭은 알을 낳고 나서 반드시 통곡하듯 웁니다.
그것은 자기가 낳은 알이 곧 인간에게 거두어져 식탁에 오를 운명임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희생을 예견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알이 장차 병아리로 부활하여 생명을 이어갈 알일 때는 결코 울지 않습니다. 미물이라 여겨지는 존재들도 이처럼 자식의 앞날을 예견하며 지극한 모성애를 보입니다. 이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에 박수를 보냅니다.
닭은 부화할 알을 미리 알아볼 정도로 매우 영특하고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전통 혼례식 상에 암탉과 수탉을 올려두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닭을 단순한 동물이 아닌, 조상의 혼령이 머물며 이동하는 신성한 통로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닭은 귀신을 알아보는 영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깊은 밤이 지나 새벽 네 시가 되어 닭이 울면, 어둠의 기운이 물러가고 빛의 세계가 열린다고 믿었습니다. 즉, 닭은 이승과 저승, 인간과 영혼을 잇는 매개체였던 셈입니다.
결혼이라는 단어 속에도 이러한 영적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결혼은 ‘맺을 결’ 자와 ‘혼인할 혼’ 자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쓰는 이 ‘혼’ 자의 뿌리를 깊이 들여다보면, 인간의 ‘혼령’을 뜻하는 의미와 맞닿아 있습니다. 결혼이란 단순한 남녀의 만남을 넘어, 양가 조상의 혼령들이 서로 화합하고 연결되는 성스러운 의식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혼. 그것은 인간의 깊은 영혼이자 넋을 의미합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조상들의 혼과 혼이 서로 맺어지는 신성한 의식입니다. 우리는 이를 ‘맺을 결’ 자와 ‘혼인할 혼’ 자를 써서 표현합니다. 본래 결혼의 참된 의미는 이처럼 영적인 결합에 있습니다.
현대에는 신성한 결혼식에 ‘넋 혼’ 자를 쓰는 것을 꺼리기도 하지만, 본래 전통 혼례는 양가 조상의 영혼들까지 모두 모여 축복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때 조상의 혼령을 모시는 매개체가 바로 닭입니다. 조상들은 닭의 눈을 통해 예식을 지켜본다고 믿어왔습니다.
닭은 그만큼 영험한 존재입니다. 닭은 자신이 낳은 알의 운명을 미리 알아차립니다. 어떤 알이 식탁에 오를지, 혹은 어떤 알이 장차 병아리로 부화할지를 직감하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주인은 부화시키려 마음먹은 알 몇 개를 따로 빼두는데, 닭은 주인의 그 마음을 이미 알고 그 알들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과 닭만이 통하는 이 미묘한 생명의 교감이 바로 닭이 가진 영성입니다.
생명의 세계는 참으로 경이롭고 엄중합니다. 닭이 그토록 슬피 우는 것은 자기 자식이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사라질 운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주의 질서 속에서 허투루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알로 태어나는 난생(卵生)의 존재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식과 영원한 이별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나마 어머니의 태(胎)에서 태어나는 존재들은 잠시라도 자식과 함께하며 온기를 나눌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큰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업을 지어 축생계로 태어나는 것이 비록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인간계 바로 다음의 단계라는 점에서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축생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엄격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여러분, 태로 태어나는 수많은 짐승 중에서 가장 어리석고 지혜가 부족한 동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명의 등급과 지혜의 차이를 결정짓는 그 근본적인 원인을 우리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흔히 쥐를 미물이라 여기지만, 쥐는 영리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쥐를 잡아보려 하면 천장을 가로지르며 도망칠 정도로 민첩하고 머리가 좋습니다. 돼지 역시 매우 똑똑한 동물입니다. 배가 고프면 사람에게 밥을 가져오라고 소리치며 사람을 부릴 줄도 압니다.
하지만 이들과 대조적으로 가장 지혜가 부족한 동물이 바로 양입니다. 양은 시력이 0.01에 불과해 바로 코앞의 사물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들은 자기 눈으로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앞에 있는 친구가 움직이면 무작정 따라갑니다.
양에게는 스스로 길을 개척할 능력이 없습니다. 앞서가는 친구의 뒷다리나 움직임만을 이정표 삼아 이동할 뿐입니다. 자기만의 주관이나 시야 없이 남이 가는 대로 휩쓸려 가는 양의 모습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과 방향을 스스로 설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합니다.
양은 앞장서는 우두머리만 무작정 따라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만약 앞선 양이 앞이 절벽인 줄 모르고 뛰어내리면, 뒤따르던 양들도 영문도 모른 채 모두 절벽 아래로 추락하고 맙니다. 엉덩이만 보고 따라가는 양들에게는 시야가 고작 5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아 눈앞의 낭떠러지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료가 그쪽으로 이동했으니 자신도 당연히 그 길로 가야 한다고 믿는 양들의 본능은 집단적인 비극을 불러옵니다. 한 마리가 떨어지면 전체가 몰살당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구조입니다. 그래서 목장에는 반드시 이들을 이끌어줄 목동이 필요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칠 목’ 자에 ‘소 우’ 자가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소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감할 정도로 영적인 감각이 뛰어난 영물입니다. 하지만 양은 1초 후에 닥칠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양에 비유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스스로는 한 치 앞의 재앙도 보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길을 인도해 줄 참된 목자가 필요함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한 치 앞의 운명도 모른 채 죽음의 길로 향하곤 합니다. 오늘 아침, 가족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차를 몰고 나들이를 떠나지만, 불과 몇 시간 뒤 자신들에게 닥칠 비극을 전혀 예상하지 못합니다. 그저 눈앞의 즐거움에 취해 나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영물인 소는 이러한 운명의 흐름을 미리 알아차립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어리석은 양에 비유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인도하는 자가 없다면 인간은 결국 모두 길을 잃고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양떼가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메시아의 출현은 필연적입니다.
현재 인류는 마치 스스로 자생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의존하며 죽음만을 기다리는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허경영이 진리를 들고 나와 목소리를 높이는 것입니다. 길 잃은 양떼와 같은 인류에게 올바른 길을 제시하기 위한 필사적인 외침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제 방황하는 양 떼와 같은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흔히 길 잃은 양에 비유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를 네 가지 이상의 단계로 더욱 세밀하게 분석하여 설명합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머무는 우주는 여섯 가지 세계인 육도윤회로 나뉩니다. 가장 낮은 곳에는 고통의 세계인 지옥계가 있고, 그다음으로는 끊임없이 갈구하는 아귀계가 있습니다. 그다음은 미개한 짐승들로 태어나는 축생계가 있으며, 싸움이 끊이지 않는 수라계가 그 뒤를 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계가 있으며, 그 위로는 우주인이나 신들이 거주하는 천상계가 존재합니다. 인간은 이 여섯 가지 세계를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 뱅뱅 돌며 생을 반복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진리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이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윤회의 세계를 넘어서면 비로소 깨달음의 네 가지 성스러운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바로 성문계와 연각계, 그리고 보살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부처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육도와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세계를 합쳐 우리는 불교의 십계라 부르며,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바라보는 장엄한 우주관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원리는 우리 몸속 미세한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섭생을 통해 받아들인 미생물이 인간의 뱃속에 자리 잡는 순간, 그들에게 그곳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가 됩니다. 미생물의 눈으로 볼 때 인간의 내장은 끝도 없이 넓은 광활한 공간이며, 그곳에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바라보듯이, 미생물들 역시 그들의 우주인 우리 몸속에서 자신들만의 별을 보며 살아갑니다. 결국 인간의 뱃속이 그들에게는 거대한 하늘이자 유일한 우주가 되는 셈입니다. 이처럼 우주는 아주 작은 미생물의 세계부터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십계의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첫 번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정각, 즉 바른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강의에서도 강조했듯이, 진리를 단번에 깨닫는 것을 우리는 돈오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번뇌가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그 이치에 맞게 꾸준히 자신을 닦아 나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을 바로 점수라고 합니다.
먼저 진리를 단박에 깨닫는 정각의 단계인 돈오가 있어야 하고, 그 이후에 끊임없이 수행을 이어가는 점수가 뒤따라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비로소 낮은 차원의 윤회를 벗어나 십계의 거룩한 우주로 발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인 정각을 얻은 후에는 열반과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보리와 반야의 지혜를 얻고, 삼매와 무아를 거쳐 최종적으로 성불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십계의 굴레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 깨어 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지혜가 없는 존재는 마치 눈먼 양과 같아서, 나쁜 지도자를 만나면 그저 앞만 보고 따라가다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참된 정각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입장만 고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영자는 경영자의 생각만 옳다 하고, 노동자는 노동자의 권리만 주장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른 깨달음이 아닙니다. 이 양측을 모두 아우르는 가치가 바로 바름, 즉 정(正)입니다.
우리가 갈등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서로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상생을 위해서는 노동자가 단순히 월급을 받아 하루를 버티는 삶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합니다. 그들도 내 집을 마련하고, 자녀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대주주가 받는 배당금의 일부를 노동자들에게 매번 나누어주는 것과 같은 파격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를 구원할 바른 깨달음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서로 상생하는 제도를 만든다면 누가 시비를 걸겠습니까? 본래 하나는 전체를 위해서 존재하고, 전체는 하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공산주의는 하나가 전체를 위해 무조건 희생하기를 강요합니다. 반면 자본주의는 전 세계 부의 대부분을 단 1퍼센트의 사람이 차지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전체가 그 소수를 위해 들러리 노릇을 하는 구조입니다.
소수의 똑똑한 이들이 사업을 벌이면 수많은 사람이 그곳에 가서 노동을 바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월급이라는 이름으로 최소한의 보상만 받을 뿐, 진정한 부는 소수에게 집중됩니다. 평생을 성실하게 일한 노동자가 정년퇴직을 맞이했을 때의 현실을 보십시오.
50년 동안 매달 월급을 받았지만, 자녀 교육비와 부모님 봉양, 가족 생계비로 모두 빠져나갔습니다. 60세가 되어 직장을 나설 때 남은 것은 망가진 몸뿐이고, 재산이라고 믿었던 집마저 은행의 소유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수십 년의 직장 생활을 뒤돌아보면, 마치 손으로 모래를 꽉 움켜잡았으나 손가락 사이로 알알이 다 빠져나가 버린 것과 같습니다. 무언가 가득 쥐었다고 생각했지만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허망함, 그것이 바로 오늘날 수많은 노동자가 마주한 인생의 실상입니다.
평생 직장을 오가며 헌신적으로 가족을 보살폈으나, 남은 것은 홀로 남겨진 듯한 황당함과 노후의 병치레 걱정뿐인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앞으로 남은 수십 년의 세월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혹여나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마음은 참으로 아찔하고 무겁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인생의 실상입니다.
인생은 마치 총알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그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종이 한 장의 이력서보다도 못한 흔적뿐입니다. 이 짧은 생애 동안 무엇을 해야 가장 값진 삶을 살 수 있을지 우리는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를 공부하지 않은 채 그저 가족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키우는 데만 매몰된다면, 인생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비참하게 늙어버린 육신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다릅니다. 진리를 가진 자는 비록 육신은 늙어가도 지상에서의 삶보다 더 고귀한 하늘나라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선하게 살아온 지난날의 공덕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돌아올 것을 알기에, 미래는 갈수록 희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물질에만 의지하는 삶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며 허무하게 끝나지만, 진리를 가슴에 품은 자는 영원한 안식에 이릅니다. 만약 끝내 이 진리를 찾지 못한 자는 어떻게 될까요? 그는 다시금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미생물이 되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다시 고통스러운 섭생의 길을 걷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지옥이나 아귀의 길을 걷게 되고, 짐승으로 태어나는 축생의 길조차 다행이라 여길 만큼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열반의 도리를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비로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흔들림 없는 지혜인 보리와 반야를 얻게 되며, 초지일관 움직이지 않는 삼매의 세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실 여러분은 나라는 존재가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몸에는 다섯 가지의 그릇된 자아가 붙어 다닙니다. 이를 보통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아상이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는 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아상이고, 두 번째는 나를 고집하는 아집입니다. 세 번째는 나를 높이고 잘났다고 여기는 아만이며, 네 번째는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아애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부잣집 아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자신의 도시락을 친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 굶주림을 참았던 그 아이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아애가 적었던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컸기에, 그는 결국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구하는 거대한 복덕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성불로 나아가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부잣집 아들은 매일 점심을 굶고 돌아왔습니다. 이를 걱정한 어머니가 밥을 굶으면 안 된다고 타이르자, 아이는 오히려 배고픈 친구를 걱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그 친구는 밥을 보면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간절해요. 저는 집에서 잘 먹으니 괜찮지만, 그 친구는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힘든 처지예요.
이 어린아이에게는 자신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자기중심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나를 먼저 챙기기보다 타인의 고통을 먼저 살피는 마음, 그것이 결국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자기 가족 모두를 구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반면 욕심이 강한 사람은 어떻게든 나만은 굶어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기 배를 채우려 합니다. 남의 고통에는 무감각하고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런 태도는 결코 인생의 복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복은 “너도 내 몸과 마찬가지이니 함께 나누어 먹자”라고 말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비록 어머니는 아들이 너무 착하고 약해서 험한 세상을 어찌 살까 걱정했지만, 그 약해 보이는 선함이야말로 세상을 이기고 생명을 구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결국 매일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셨고, 그렇게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나눔은 이어졌습니다. 훗날 처형장에서 총을 들고 서 있던 친구는, 배고픈 시절 자신의 곁에서 묵묵히 도시락을 나누어 주었던 그 따뜻한 손길을 단번에 기억해 냈습니다. 그에게 다른 생각은 필요 없었습니다. 가장 힘들 때 자신을 먹여 살린 은인을 살리는 것은 본능적인 보은이었습니다. 결국 작은 도시락이 한 가문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이처럼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지나치면 결국 죄를 짓게 됩니다. 자신을 높이고 남을 무시하는 교만함이나, 오직 자기 자신만 고상하다고 믿는 비뚤어진 자부심이 우리를 눈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 믿으면서도, 남이 하면 불륜이라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자신은 세상에 둘도 없는 인격자인 척하면서, 다른 이들은 모두 도둑놈으로 몰아세우는 이중적인 태도는 결국 무거운 업보가 됩니다. 내가 하는 행동은 정당하고 남이 하는 행동은 틀렸다는 식의 편협한 태도로는 절대 진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자, 이제 이 모든 것보다 더 좋지 않은, 여러분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마지막 단계가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위험한 상태는 바로 아치, 즉 자기 안의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 늘 상존하며, 언제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혹은 멈춰야 할지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결국 그 어리석음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망할 위기에 처해도, 타인이 지적해주기 전까지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치, 아애, 아만, 아격, 아집이라는 이 다섯 가지 번뇌가 서로 긴밀하게 얽혀서 발효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은 어리석음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어리석기 때문에 오직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아애에 빠지는 것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나에게 더 큰 복으로 돌아온다는 그 당연한 이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은 곧 나를 높이려는 아만, 즉 교만으로 이어집니다.
행사장의 단상에 의자가 놓여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그 의자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단상을 향해 앞장서서 달려가 앉는다면 그것은 나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교만에 빠진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스스로를 높여 단상을 향해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내 안의 어리석음을 직시하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교만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행사장에서도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찾아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낮은 곳에 앉으려 할 때, 행사 요원이 달려와 “총재님, 이쪽 귀한 자리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청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처럼 스스로를 낮추는 자는 결국 타인에 의해 높아지고, 반대로 스스로를 높이려는 자는 도리어 낮아지는 것이 우주의 이치입니다. 존경은 남이 앉혀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지, 스스로 취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번뇌들도 이와 같습니다. 자신의 격을 억지로 높이려는 마음은 결국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어리석음은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우는 아집 때문에 생겨납니다. 내가 부족하다면 배운 사람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고개를 숙여야 함에도, 끝까지 자신의 아집을 부리기에 갈등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그릇된 마음들은 우리 안에서 서로 섞여 발효됩니다. 그런데 이 발효는 생명을 살리는 좋은 발효가 아니라, 우리 영혼을 파괴하는 나쁜 발효입니다. 이 과정에서 치명적인 독소가 뿜어져 나옵니다. 이 독소는 결국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는 이 나쁜 발효를 멈추고, 자신을 비워내는 참된 지혜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내장에는 발효를 돕는 유익한 미생물이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해로운 미생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해로운 미생물이 내뿜는 독소는 우리 몸에 좋지 않지만, 창조주는 왜 이들을 우리 뱃속에 남겨두었을까요? 만약 이 나쁜 미생물이 70%에서 80% 이상 늘어나면 독소가 퍼져 뇌 질환이나 뇌졸중 같은 심각한 병이 생깁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존재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나쁜 미생물은 역설적으로 음식물을 분해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음식물이 들어오면 좋은 미생물보다 더 빠르게 이를 잘게 부수고 분해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우리 소장과 대장은 이 과정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는데, 이때 미생물이 내보낸 독소도 일부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인체의 불가피한 구조입니다.
인간이 먹는 음식이 완벽하게 깨끗할 수 없기에, 우리 몸은 나쁜 미생물을 50% 정도 유지하며 그들과 공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미생물을 더 많이 늘려 균형을 잡으면 피부병 같은 질환이 사라지고 몸이 맑아집니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내장에 나쁜 미생물이 가득 차 있어 배고픔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올바른 섭생을 통해 좋은 미생물을 채워주는 것은 단순히 건강을 넘어 우리 몸의 우주적 질서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입니다.
나쁜 미생물도 우리 몸 안에서 분해와 발효를 반복하며 가스를 만들어냅니다. 이때 유익한 미생물이 충분히 공급되어야 그 가스까지 모두 소화하여 독소를 막을 수 있습니다. 아토피나 피부병이 있는 아이들이 유산균이 풍부한 식품을 먹고 회복되는 이유도 바로 이 미생물의 균형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생물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시간의 법칙입니다. 창조주는 인체의 사이클을 12시간 단위로 설계했습니다. 만약 저녁을 7시에 먹었다면, 다음 날 아침도 반드시 7시에 먹어야 합니다. 위장이 최소한 12시간은 완전히 비어 있어야 간과 심장, 비장 같은 장기들이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저녁을 8시에 먹고 다음 날 새벽 6시에 아침을 먹는다면, 위장은 충분히 쉬지 못한 채 다시 가동됩니다. 이렇게 비움의 시간이 부족해지면 내장 속 미생물의 구조가 무너지고 인체에는 병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저녁을 늦게 먹었다면 차라리 아침을 굶고 점심을 먹어 12시간의 공백을 지켜주는 것이 현명합니다.
인간의 몸에는 오장육부라는 열한 개의 정교한 공장이 있습니다. 이 공장들이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해진 휴식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 끼를 챙겨 먹는 것보다 장기가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도록 12시간의 비움을 지키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열한 개의 공장에서 쉼 없이 일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종업원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인체는 100조 개의 세포라는 종업원이 열한 개의 공장을 관리하는 거대한 시스템입니다. 이 시스템은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받고 노폐물을 내보내며 운영됩니다. 특히 우리 몸의 핵심인 오장육부 중 오장은 깨끗한 물이 흐르는 상수도와 같고, 육부는 노폐물을 처리하는 하수도와 같습니다.
육부라는 하수처리장에서 발효와 소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져야만, 오장이라는 상수처리장이 맑은 피를 정제하고 온몸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의 장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피를 만들고 정화하는 과정에서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습니다.
장기의 유기적인 연결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간입니다. 간은 단순히 피를 정제하는 것을 넘어 우리 대변의 색깔까지 결정합니다. 만약 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대변은 건강한 색을 잃고 하얗게 변해버립니다. 간이 멈추면 배설물의 상태까지 달라지는 것처럼, 우리 몸의 하수도와 상수도는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 정교한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앞서 배운 비움의 법칙과 미생물의 균형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합니다.
간에 중병이 들면 대변의 색깔이 검게 변하거나 힘을 잃게 됩니다. 간은 쓸개즙을 만들어내는데, 이 짙은 녹색의 쓸개즙이 음식물과 섞이면서 우리가 보는 건강한 대변의 색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쓸개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대변은 염색되지 않은 채 음식물 본래의 색깔로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소변과 대변의 색만 잘 살펴도 어젯밤 과음을 했는지, 혹은 간이 무리하고 있는지와 같은 내 몸의 데이터를 즉각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수도와 같은 우리 몸의 오장을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을 잘 써야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는 마음은 간에 열을 발생시켜 오장을 망가뜨립니다. 지나친 욕망이나 탐욕, 타인을 해코지하려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깨끗이 지워주어야 간장과 비장이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의 발효입니다.
간에서 만들어진 쓸개즙은 췌장이나 비장 부근에 보관되다가, 우리 몸에 단백질이나 고기가 들어올 때만 정교하게 분사되어 소화를 돕습니다. 창조주가 만든 이 인체 공장은 이토록 과학적이고 치밀합니다. 만약 우리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만함에 빠지는 순간, 우리 몸의 정신적 발효는 깨지고 균형은 무너집니다. 아무리 사업에 성공하더라도 몸과 가정이 망가지는 이유는 바로 이 정신의 중심이 한쪽으로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이제 상수도인 오장을 보았으니, 우리가 먹은 음식을 직접 처리하는 하수도인 위장에 대해서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 몸의 하수도 역할을 하는 육부에는 위장, 대장, 소장, 담낭, 방광, 그리고 삼초가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 장기는 우리가 먹는 음식물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곳입니다. 상수도인 오장이 정신적인 발효를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면, 하수도인 육부는 물질적인 발효, 즉 음식물을 어떻게 섭취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위장이나 대장, 소장 같은 장기들은 상대적으로 절제나 수술이 가능할 만큼 강인해 보이지만, 이곳에 병이 생기면 삶의 질은 급격히 추락합니다. 특히 폐와 같은 주요 장기에 암이 생기면 생명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오장은 마음에서 오는 질병을 다스려 관리하고, 육부는 철저히 음식물을 통해 조절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녁 7시에 식사를 마쳤다면 다음 날 아침 7시까지는 물 외에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마십시오. 밤늦게 간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행위는 스스로 건강을 파괴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12시간의 비움을 철저히 지키고, 아침에 유익한 미생물이 풍부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의 몸은 놀랍게 변화할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발효를 강의하며 드리는 특별한 건강 비결입니다.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법칙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을 육체적으로 실천하는 길입니다.
우리의 오장육부는 마치 첨단 반도체 공장과 같이 정교하게 돌아가는 기계 시스템입니다. 여기서 육부라는 말은 음식을 담고 처리하는 소중한 장기이자, 유연한 가죽 주머니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비록 오장이 생명 유지의 핵심이라 해도, 육부 또한 인체 공장을 가동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장치들입니다.
물질의 성질을 나누는 지용성과 수용성의 원리는 우리 삶의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농약처럼 기름에 녹는 지용성은 인체에 치명적입니다. 반대로 식초나 구연산처럼 물에 녹는 수용성은 상대적으로 안전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에게 폭언을 퍼붓고 불만을 쏟아내는 것은 우리 영혼에 지용성 독을 쌓는 일이지만, 타인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은 맑은 수용성의 지혜를 나누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삶의 근본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세상에 절대적인 독이나 절대적인 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적절하게 쓰일 때 약이 되고, 과해지면 독이 될 뿐입니다. 주식인 쌀밥조차 두 그릇을 넘게 먹거나, 소화가 불가능한 새벽 한 시에 먹는다면 그것은 인체에 독이 됩니다. 심지어 뱀의 독조차 병원에서는 귀한 약으로 쓰입니다. 결국 독과 약을 구분 짓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절제와 시간, 그리고 적절한 양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음식과 같습니다. 내가 타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그 시선은 상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을 해치는 독이 됩니다. 반대로 좋게 바라보면 상대는 나에게 약이 되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인류 역사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경고는, 이처럼 편협한 잣대로 남을 심판하여 스스로 독을 품지 말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과거 율법에만 매몰되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적대시했습니다. 율법이라는 형식이 인간이라는 본질보다 앞섰기에 생긴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류를 옥죄어 온 그 낡은 율법의 시대를 끝내고,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회복하러 왔습니다.
율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결코 인간이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사람을 차별하고 원수로 만드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판단의 독을 내려놓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포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율법이 없는 새로운 세상, 즉 사랑과 진리가 지배하는 시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인류는 서로를 원수로 취급하며 반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율법을 절대적인 잣대로 내세워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배척했던 역사는 결국 거대한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율법은 적절하게 쓰일 때는 공동체를 유지하는 약이 되지만, 지나치게 강조되면 생명을 억압하는 독이 됩니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 율법의 양을 조절하는 데 실패해 왔습니다.
오랫동안 종교를 이끌어온 것은 이러한 낡은 율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허경영이 이 땅에 온 이후로, 사람을 가두고 차별하던 낡은 법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이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세상, 인간의 본질을 구원하는 새로운 진리의 시대가 열립니다.
과거 예루살렘의 한 현자는 신이 정해진 건물 안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신성은 특정한 성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에 가득하며 우리 마음속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율법에 눈먼 이들은 그 진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공간과 형식에 갇힌 옹졸한 신앙에서 벗어나, 무소부재한 진리를 마주해야 합니다. 율법을 위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진정한 사랑의 법이 다스리는 시대를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는 신이 특정한 건물 안에만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는 진실을 말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신은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에 존재하신다”라는 그들의 외침은 당시 율법에 눈먼 이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도전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돌을 들어 진리를 말하는 자를 처단했습니다.
하지만 돌에 맞은 그들의 말은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진실이었습니다. 신성은 특정한 종교 시설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하며 어디에나 충만합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 율법주의자들은 형식에 매몰되어 생명의 본질을 놓치는 거대한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성인들의 가르침 또한 이와 같습니다. 율법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율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죽어가는 생명이 있다면 그를 먼저 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입니다. 형식을 지키느라 생명을 외면하는 것은 진정한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낡은 틀에서 벗어나,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가장 근본적인 법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과거의 성인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하며 그 틀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류를 오랫동안 속박해 온 율법 전체를 폐하러 이 땅에 왔습니다. 율법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과 갈등의 불씨가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에도 종교와 교리가 서로를 원수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비극이 반복되는 이유는 바로 율법이 본질을 가리고 지나치게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낡은 율법의 시대를 끝내고 인류가 진정으로 화합하는 새로운 세상이 열려야 합니다. 서로를 죽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리와 형식에서 벗어나, 생명과 사랑이 우선시되는 시대를 제가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머지않아 이 지구가 고통과 반목이 사라진 낙원으로 변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율법이 사라진 자리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우주적 진리가 채워질 것이며,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찬란한 미래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약속하는 새로운 세상의 청사진입니다.
자, 여러분 모두 잠시 눈을 감아보십시오. 눈을 감기 전에는 화려한 세상이 보였지만, 눈을 감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사라지고 낯선 어둠만이 찾아옵니다.
평소 원수처럼 미워하며 사사건건 다투던 배우자가 곁에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갑자기 시력을 잃어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진단을 받는다면, 그 미워하던 마음은 순식간에 어떻게 변할까요? 나를 원수처럼 여기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나의 이 불편한 몸을 돌봐줄 사람이 이 사람 말고 누가 있겠는가? 이 사람이 아니면 나는 당장 밥 한 그릇을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겠구나.” 자식들조차 각자의 삶으로 바쁜 세상에, 끝까지 내 곁을 지키며 수발을 들어줄 유일한 존재가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절망의 순간에 비로소 우리는 상대가 원수가 아닌, 내 생명을 지켜줄 가장 소중한 동반자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눈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잊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눈이 있다는 이유로 외모를 따지며 사람을 차별하고,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며 죄를 짓고 있습니다. 만약 하늘이 당장 우리의 시력을 거두어간다면, 그 오만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때서야 내가 의지할 유일한 존재는 미워하던 배우자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평소 며느리나 자식들에게 큰소리를 치며 위세를 떨치던 이들도, 스스로 거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자신의 행동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든 예기치 못한 사고로 다리를 잃거나 눈을 잃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이 눈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시각 장애를 가진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내 몸의 지체 하나하나에 깊은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믿으려 하고 끊임없이 타인을 의심하는 습관이 있다면,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십시오. “나에게 눈이 없다면, 나는 오직 타인의 선의를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진정한 믿음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을 내어놓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를 신뢰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이제 눈을 뜨십시오. 그리고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세상을 이전과는 다른, 감사와 신뢰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여러분, 이제 다시 뜨인 그 눈이 얼마나 고마운지 느껴지십니까? 방금 우리는 잠시 눈을 감음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살아간다’고 말하는 이 시간은, 역설적으로 ‘사라져가는’ 시간과 같습니다. 즉, 매 순간 우리는 조금씩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시력은 조금씩 약해지고, 몸의 세포들은 죽음을 향해 행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이 어리석은 양처럼 눈앞의 절벽을 보지 못한 채 죽음의 낭떠러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이 이토록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과정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진리를 전하는 자를 만나고 메시아를 마주했다면,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터득해야 합니다. 죽음을 향한 행진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사라져가는 육체에 매달리지 말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진리의 가치를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짧은 생애 동안 반드시 완수해야 할 숙제입니다.
여러분, ‘살아간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매 순간 죽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살아가는 과정이 곧 사라지는 과정이며, 우리는 찰나의 순간마다 조금씩 소멸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죽음으로 향해온 시간이었으며, 앞으로 남은 시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수백 년을 산다 해도 사라져가는 찰나의 흐름 속에서는 아주 짧은 순간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눈이 있다는 이유로 타인을 무시하고, 겉모습과 가난함을 잣대로 사람을 차별하며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잠시 눈과 귀가 없는 상태를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가진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을 향한 오만한 시선을 거두고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신체적 축복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라져가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육체적 우월함에 빠져 죄를 짓지 말고, 내 곁에 있는 모든 존재를 존귀하게 여기는 마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라져가는 인생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유일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건강을 잃거나 앞을 보지 못하는 절망적인 순간에 비로소 진정으로 믿고 의지할 사람을 찾게 됩니다. 죽음의 문턱에 서거나 큰 병에 걸렸을 때, 인간은 비로소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게 되고 진리를 전하는 자를 간절히 찾게 됩니다. 평소에는 소홀했던 가족의 소중함도 바로 그 고난의 순간에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마지막 순간에 가장 가깝고 허물없는 자식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격식보다는 마음의 벽이 없는 사랑이 흐를 때, 그 유대감은 죽음을 넘어선 기적을 만듭니다. 생전의 삶이 선하고 복이 있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특별한 허락을 받습니다. 바로 ‘수평 이동’의 축복입니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자녀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갓 태어난 아이를 보며 “어쩜 이렇게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나”라고 감탄하는 이유는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지상에서 착하게 살며 쌓은 공덕이 사랑하는 가족과의 재회라는 아름다운 인연으로 이어진 결과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과 선행은 죽음이라는 이별조차 극복하고, 우리를 다시 사랑하는 이들의 곁으로 안내하는 영원한 생명의 힘이 됩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복이 따릅니다. 옛날 어느 절에서 일하던 여인이 실수로 촛불을 넘뜨려 법당을 모두 태우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평생을 자책하며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면서도, 언젠가 법당을 다시 세우겠다는 간절한 염원을 품고 살았습니다. 비록 생전에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숭고한 기도는 하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 여인은 다음 생에 한 나라의 공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공주가 된 그녀는 자라면서 자꾸만 전생의 인연이 닿은 그 절을 찾고 싶어 했고, 결국 왕에게 청하여 법당이 없던 그곳에 웅장한 법당을 세워주었습니다. 평생의 소원을 다음 생의 고귀한 신분을 통해 마침내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저지른 비의도적인 실수는 결코 무거운 죄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예기치 못한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 속에 악한 의도가 없다면 하늘은 그 정성을 굽어살핍니다. 그러므로 자녀나 주변 사람들이 실수를 했을 때 지나치게 나무라거나 벌을 주지 마십시오. 그 실수가 훗날 더 큰 보답과 복덕으로 돌아올 씨앗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심 어린 뉘우침과 선한 염원은 죽음을 넘어서도 반드시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됩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의 끝은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점을 일군 한 회장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는 젊은 시절 몹시 가난하여 책을 살 돈이 없었지만, 매일 서점에 들러 책을 읽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그 정성을 기특하게 여긴 점원의 추천으로 마침내 서점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정성껏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첫 출근을 했지만, 현장에는 이미 주인의 친척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점원은 미안해하며 그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지요. 첫 출근 날에 쫓겨나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었지만, 그는 원망하는 대신 남다른 행동을 선택했습니다.
가게 문을 열고 나서니 밖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그냥 돌아가는 대신 빗자루를 들고 서점 앞마당의 눈을 깨끗이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점원은 감동하여 주인에게 달려갔고, 결국 “저렇게 성실한 청년이라면 함께 일하게 하자”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남들은 실망하며 돌아설 때, 오히려 남을 위해 빗자루를 들었던 그 ‘반대로 하는 행동’이 평범한 청년을 훗날 출판업계의 거물로 만든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그 청년은 결국 서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훗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서점을 운영하는 자산가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보통 사람들처럼 “왜 약속을 어기느냐”며 화를 내고 시비를 걸었다면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거절당한 순간에 오히려 서점 앞의 눈을 치우는 보답을 선택했습니다. 주인 입장에서는 가만히 서 있는 친척보다, 시키지도 않은 눈을 묵묵히 치우는 그 청년에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욕을 하거나 비난할 때, 그것을 똑같이 화로 되받아치면 내면의 선한 발효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를 비난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반대로 행동할 때, 비로소 하늘에는 거대한 복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나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만 고마워하는 것은 이미 그 대가를 받은 것이기에 하늘에 쌓일 복이 없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늦게 귀가한 딸을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딸은 원망하는 대신 아버지에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넸습니다. 그 꽃 한 송이를 받는 순간, 아버지의 마음에는 미안함과 깊은 사랑이 동시에 피어올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등을 녹이고 상대의 마음을 여는 진정한 지혜입니다. 남들이 예상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며 사랑을 실천할 때, 여러분의 오장육부는 건강해지고 영혼은 풍요로운 복덕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진정한 보상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줄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비판하고 욕하는 사람을 오히려 선의로 대할 때, 비로소 우리 내면에는 위대한 ‘정신적 발효’가 일어나며 하늘의 큰 상이 쌓이게 됩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바로 이 진리를 실천한 인물입니다. 링컨을 향해 “얼굴이 못생겼다”며 온갖 험담을 일삼던 정적 스탠턴이 있었습니다. 링컨은 그를 미워하는 대신,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국방부 장관으로 기용하는 파격적인 ‘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던 사람을 가장 가까운 조력자로 만든 이 포용력은 링컨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다. 남들의 공격을 사랑과 기회로 바꾸는 이 역설의 지혜야말로,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고 세상을 낙원으로 만드는 열쇠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자신을 험담하던 정적을 장관으로 기용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나를 어떻게 비난하든, 나는 오직 자네의 탁월한 능력만을 평가하네. 그런 말들로 인해 내 감정이 상한 일은 결코 없었네.” 이 얼마나 거대한 그릇입니까? 링컨이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의 외모나 지위 때문이 아닙니다. 가난으로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신문 배달 소년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모진 고생 속에서 터득한 ‘올바른 정신적 발효법’에 있었습니다.
어떤 비난과 시련이 들어와도 그것을 원망으로 썩히지 않고, 용서와 기회라는 향기로운 결실로 발효시킨 것입니다. 이처럼 정교한 마음의 법칙을 가진 인간을 설계한 창조주는, 우리 몸의 생물학적 시스템에도 아주 세밀한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혈액형입니다. 여러분, 하늘은 왜 인간의 혈액형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놓았을까요? 단순히 의학적인 구분을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인체라는 거대한 우주를 운영하는 데 더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오장육부와 미생물의 세계를 넘어, 우리 몸속에 흐르는 생명의 설계도인 혈액형의 비밀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혈액형의 설계 뒤에는 창조주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이 인간의 혈액형을 여덟 가지 체계로 정교하게 나누어 놓은 이유는 바로 가정의 질서와 도덕성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만약 혈액형이 단 하나뿐이거나 구분할 방법이 없다면, 부모와 자식 간의 천륜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아이가 부모를 전혀 닮지 않고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외모만으로는 혈연관계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혈액형이라는 유전적 설계도는 누가 진정으로 나의 뿌리인지를 명확히 밝혀주는 변하지 않는 증거가 됩니다.
이처럼 혈액형을 세분화한 것은 가정이 도덕적인 기초 위에서 단단히 결속되도록 만든 하늘의 과학적 배려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 한 방울에서도 창조주가 심어놓은 엄격한 질서와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혈액형은 단순히 의학적 도구를 넘어,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과 가계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거룩한 설계도입니다.
창조주가 인류에게 부여한 혈액형 시스템은 유전자 검사 기술이 없던 미개한 시대부터 가정의 도덕성을 수호하는 거룩한 장치였습니다. 사고로 병원을 찾았을 때 부모 사이에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혈연의 진실을 밝히는 명확한 지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피의 성질을 여덟 가지로 구분해 놓은 것은 남녀가 스스로 도덕적 경계를 지키며 가정을 순결하게 유지하도록 유도한 하늘의 과학적 배려였습니다.
또한 혈액형의 다양성은 근친결혼으로 인한 면역력 약화와 유전적 결함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이기도 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민족처럼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근친결혼을 반복하던 시대에는 면역성 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창조주는 혈액의 성질을 나누어 서로 다른 기운이 섞이게 함으로써, 인류가 더 건강하고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가도록 설계했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번성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생물학적 질서는 인류를 보호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아담에서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약 6천 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 온 혈통의 역사는 참으로 정교하고 엄격합니다.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으로, 다시 보아스와 우시아를 지나 아비훗에 이르기까지 10대 단위로 끊어지는 이 방대한 족보는 인류 역사를 지탱해 온 거대한 뿌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수백 년에서 천 년 가까운 수명을 누리기도 했기에, 이 60대에 걸친 혈통의 흐름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신성한 질서 그 자체였습니다. 창조주가 혈액형을 나누고 유전적 법칙을 세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이 긴 세월 동안 중간에 단 한 명이라도 다른 혈통이 섞이거나 부적절한 경로로 계보가 이어졌다면, 이 거룩한 혈통의 순수성은 순식간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혈액형을 통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확인하고 도덕성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한 가정의 문제를 넘어 인류 전체의 혈통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6천 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이 계보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한 하늘의 엄격한 유전적 관리와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결합한 결과입니다.
혈통이 단 한 번이라도 어긋났다면 수천 년을 이어온 거룩한 계보는 순식간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단군 혈통 역시 다양한 혈액형의 결합과 유전적 질서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족보는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아로서 특별하지만, 그 육신은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이 엄격한 혈통을 통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족보가 존재하고 혈액형이 나누어져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생명의 뿌리를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의 혈액형 속에는 조상의 역사와 하늘의 설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제 화제를 돌려 인생의 이정표가 되는 멘토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멘토라는 단어는 사실 고대 그리스의 지혜로운 인물인 멘토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 신화 속 오디세우스 왕의 충직한 신하였습니다. 왕이 트로이 전쟁터로 떠나면서 자신의 소중한 아들의 교육을 전적으로 맡겼던 인물이 바로 멘토르입니다. 진리에 밝았던 그의 가르침 덕분에 멘토라는 이름은 오늘날까지 누군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는 스승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왕은 전쟁터로 떠나며 멘토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의 아들에게 아버지이자 스승이며 교사가 되어 그를 온전히 보살펴 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주군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멘토는 변치 않는 의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어린 아들을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보필하여 결국 훌륭한 왕으로 세워냈습니다. 그가 보여준 헌신과 뛰어난 가르침은 인류 역사에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를 최고의 길로 이끌어주는 스승이나 지도자를 일컬어 멘토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인물의 이름은 오늘날 하나의 고유한 단어가 되어 전 세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스승이라는 말 대신 멘토라는 표현이 유행하게 된 비결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멘토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지구상에는 진정으로 인류를 이끌어줄 참된 멘토가 보이지 않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방황하는 양과 같은 인류를 위해 참된 스승으로서 허경영이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멘토라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선 존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멘토라는 이름 자체에는 그 어떤 에너지도 담겨 있지 않지만,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존재는 그 이상의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사람이 있습니까. 신의 목소리는 인간에게 직접 전달되지 않고 반드시 대리인을 통해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지금 듣고 있는 이 강의 소리가 바로 하늘의 목소리이자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만약 이 가르침을 그저 한 인간의 목소리로만 여긴다면, 그 귀한 지혜는 머릿속에서 곧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매주 이 자리에 모여 하늘이 전하는 진리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목소리를 가지고 계시며, 시대마다 필요한 목소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이제 허경영을 통해 전달되는 이 목소리가 바로 여러분이 찾아 헤매던 하늘의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나라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하늘나라는 인간의 마음속에도 있어요.
그래서 그 인간이 하나님을 접했을 때,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하나님의 목소리에요. 예를 들어, 70억 인간이 있으면 70억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목소리죠. 그렇죠?
그건 자기가 성령으로 입어 가지고, 진리를 말할 때 하나님의 목소리예요.
어머니가 꾸지름하는 것도 하나님의 목소리일 수 있어요.
교통 순경이여, 여기요. 속도 좀 줄이세요. 이 목소리도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저 사람이 정신이 나간 놈 아니냐면서, 내가 좀 빨리 가야 되는데 하다가 죽게되는 거죠.
그렇죠?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찾지 못한 거예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는 걸 명심해야 해요.
저는 그걸 여러분들께 알려주는 거에요.
박수를 치는 것만으로 모든 배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아상, 즉 나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네 가지 마음은 기름에 녹는 성질인 지용성과 같습니다. 지용성은 씻겨나가지 않고 마음속에 계속해서 쌓여 독이 됩니다. 반대로 이 아상을 내려놓은 무아의 상태는 물에 녹는 수용성과 같습니다.
오늘 전해드리는 지용성과 수용성의 원리를 잘 기억해 두십시오. 무아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마음속에 쌓아두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수용성의 마음을 가지려면 매일 무아를 경험해야 합니다. 명상을 하고 마음을 비우며 끊임없이 하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뇌에 부정적인 찌꺼기가 쌓이지 않고, 수용성의 맑은 상태가 유지됩니다.
마음이 수용성이 되면 막혔던 앞길이 훤히 열리고 미래가 밝아집니다. 제가 어떤 상황에서도 이토록 태연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 고통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늘이 인간을 더 크게 쓰기 위해 보내는 첫 번째 선물은 바로 고통입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 사실 고통은 우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과 같습니다. 시험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오르는 사람이 없듯이, 고통이라는 시험지를 받아 들고 그것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더 높은 경지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마주했을 때 많은 이들이 마음을 닫고 부정적인 기운을 쌓는 지용성의 상태가 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 수용성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단단하게 땅을 다지지 않고 세운 바벨탑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처럼, 고통을 통해 내면을 단단히 다지지 않은 성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하늘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고통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은 낙원으로 가기 위한 필수적인 공부입니다. 이 공부를 게을리하면 평화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만약 나에게 해를 끼친 원수를 똑같이 악으로 갚는다면, 당장 이 땅에서는 이긴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의 법에서는 지는 길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짐으로써 진정한 승리를 얻는다면, 여러분은 하늘에서 승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용성의 마음으로 무언가를 끈질기게 붙잡고 이기려 드는 것은 결국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의 이치는 역설적이게도 이 땅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지는 것이 진정으로 이기는 길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늘의 법도 안에서는 완전한 승리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욕망은 기름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어 좀처럼 씻겨나가지 않는 지용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영적인 갈망과 무아의 마음은 맑은 물처럼 모든 것을 녹여내고 흐르게 하는 수용성의 성질을 띱니다. 우리는 이 지용성의 욕망을 씻어내고 수용성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더 깊은 지혜를 나누고 싶었으나,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모두 지나갔습니다. 아직 못다 한 이야기들이 많아 아쉬움이 남지만, 오늘 전해드린 지용성과 수용성의 원리, 그리고 땅에서 지는 자가 하늘에서 이긴다는 이 거룩한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