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 이방원의 시조 **「하여가(何如歌)」**입니다.

이방원이가 하여가何如歌. 차역하여피역하여此亦何如彼亦何如 이렇게 보면 그 다음에 이 사람이 뭐라고 그랬어요? 만수산 갈등이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만수산갈등혼잡역하여萬壽山葛藤混雜亦何如

아배야차我輩若此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위백생역하여爲百生亦何如. 백년동안 백년을 같이 살면 어떻겠나?

이 충忠이 있는 자가 뭐라고 그래요?

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야여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항주일편단심向主一片丹心 한 임금을 위한 일편단심

허경영許京寧이면 허경영許京寧. 이것이 절대섭리絶對攝理에 들어가는 거야.

허경영許京寧 할 때 영자寧字죠? 영유개리야여. 한 임금을 위한 내 마음이 가실 줄이 있으랴?

내가 왜 이 말을 오늘 하냐면 이 절대적 윤리絶對的倫理가 상대적 윤리相對的倫理로 다 바뀌어 버렸어.

이방원의 시조 「하여가(何如歌)」입니다.

고려 말,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뒤의 태종)이 정몽주에게 새 왕조에 같이 가자는 뜻으로 읊은 노래예요. 정몽주는 그 대답으로 「단심가」를 읊었습니다.

흔히 이렇게 전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뜻은 대략 이렇습니다.

  • 만수산: 개성 송악산 서쪽의 산
  • 드렁칡: 덩굴칡. 이리저리 엉킨 칡
  • 얽혀진들 어떠하리: 칡처럼 서로 얽혀도 어떠냐
  • 백 년까지 누리리라: 그렇게 맺어져 오래 같이 살자

즉 “고려든 조선이든 어떠하냐. 우리끼리 칡처럼 얽혀 오래 살면 되지 않느냐”는 회유·공존의 말입니다.

붙여 주신 한자
萬壽山葛藤混雜亦何如
도 같은 구절을 한자로 풀어 쓴 것입니다.
(만수산의 칡덩굴이 뒤섞여도 또한 어떠하리)

그래서 제목에 있는 만수산 드렁칡은 독립된 다른 시가 아니라, 하여가의 핵심 구절입니다.

영어로는 보통 이렇게 씁니다.

음역

  • Hayeoga

뜻으로 옮긴 제목

  • What Does It Matter?
  • The “What Does It Matter” Song
  • Song of “How Would It Be?”

한자 何如歌의 뜻은
何如 = 어떠하리 / how would it be, what does it matter
歌 = song

그래서 가장 무난한 표기는:

Hayeoga (“What Does It Matter?”)

상대작인 정몽주의 단심가는 영어에서 흔히 Dansimga 또는 Song of Unchanging Loyalty라고 합니다.

하여가에 나오는 만수산은 우리나라 땅의 산이 맞습니다.

다만 지금은 북한 개성에 있습니다.

하여가의 만수산은 개성 송악산(松嶽山) 서쪽, 또는 송악산을 달리 부르던 이름과 겹쳐 전해집니다. 고려 수도 개경(송도) 쪽 산입니다.
한국전쟁 뒤 개성이 북쪽에 남아서, 그 산도 지금 행정으로는 북한입니다. 역사적으로는 한국사 속의 산입니다.

이름이 같은 산이 남한에도 있습니다.

  • 인천 남동구 만수동의 만수산
  • 충남 부여·보령 경계의 만수산

이 산들은 하여가의 그 산이 아닙니다.
시조의 “만수산 드렁칡”은 개성 쪽 만수산을 가리킵니다.

하여가의 칡은 그 산에 칡이 특별히 많다는 조사 기록이 아니라, 비유에 가깝습니다.

드렁칡은 덩굴처럼 이리저리 감긴 칡입니다.
한자로도 葛藤(갈등) — 칡과 등나무가 서로 엉킨 모습 — 이라서, “서로 얽혀 떨어지지 못함”을 말할 때 오래 써 온 이미지입니다.

이방원이 말한 뜻은
“만수산에 칡이 잔뜩 있다”가 아니라
칡처럼 우리가 한데 얽혀도 어떠하냐입니다.

실제로 칡 자체는 한국 산에서 흔한 식물입니다. 개성·송악 일대도 온대 산지라 칡이 살 환경은 됩니다. 다만 “만수산은 칡의 명산이다” 같은 옛 지리서·식물 기록은 잘 안 보입니다. 산 이름에 칡이 붙은 것도 아닙니다.

정리하면:

  • 시 속의 칡 → 얽힘, 인연, 공존의 상징
  • 산의 실제 칡 → 있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시조의 핵심 근거는 아님

둘은 옳고 그름이 어디에 붙느냐를 두고 갈립니다.

절대적 윤리 (moral absolutism)

어떤 행위는 언제, 어디서, 누가 하든 옳거나 그르다는 입장입니다.

  • 살인, 거짓말, 배신은 상황과 상관없이 나쁘다
  • 정직, 약속 지키기, 생명 존중은 언제나 옳다
  • 문화가 달라도, 결과가 좋아 보여도 규칙은 안 바뀐다

가까운 예:

  • “거짓말은 언제나 immorality하다” (칸트식)
  • “살인하지 말라”를 예외 없이 지키는 종교·자연법 윤리

장점: 기준이 분명하고, 힘 있는 쪽이 규칙을 마음대로 바꾸기 어렵다.
단점: concretely “거짓말해서 사람을 숨겨 살리는 경우” 같은 충돌을 설명하기 어렵다.

상대적 윤리 (moral relativism)

옳고 그름이 사회, 시대, 개인,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는 입장입니다.

  • 한 문화에선 맞고, 다른 문화에선 틀릴 수 있다
  • “그 사회가 옳다고 하면 그 사회 안에서는 옳다”
  • 보편 도덕은 없거나, 있어도 매우 얇다

가까운 예:

  • 일부 사회는 일부다처를 허용하고, 다른 사회는 금지한다
  • 옛날엔 맞다고 한 일이 지금은 틀리다고 한다

장점: 문화 차이를 인정하고, 자기 기준을 세계에 강요하기 어렵다.
단점: “그 나라에서 탄압이 전통이면 괜찮은가?”처럼 비판할 바닥이 약해질 수 있다.

한눈에

절대적 윤리 상대적 윤리
기준 보편, 불변 문화·시대·상황
질문 “이것은 원래 옳은가?” “누구에게, 어디서 옳은가?”
위험 융통성 부족 “다 상대적”으로 흐르기
흔한 짝 의무론, 자연법, 종교 계명 문화상대주의, 상황윤리

중간에 있는 입장도 많습니다.

  • 상황 윤리: 큰 원칙(사랑, 생명)은 두되, 적용은 상황에 맞춘다
  • 보편 최소 윤리: 고문·학살처럼 몇 가지는 절대 금지, 나머지는 문화에 맡긴다

짧게 말하면
절대적 윤리는 “도덕에 예외 없는 법칙이 있다”이고,
상대적 윤리는 “도덕은 그 자리의 약속이다”입니다.

끌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다만 “그래서 더 좋다”로 바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절대적 윤리가 좋아 보이는 지점

  •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다. “힘 있는 쪽이 옳다”로 가기 어렵다.
  • 약자를 지킬 때 쓰기 좋다. 고문·학살·아동 학대는 그 나라 관습이어도 틀리다고 말할 수 있다.
  • 약속을 믿을 수 있다. “이번만 거짓말”이 쌓이면 신뢰가 무너진다.
  • 마음이 급할 때도 판단이 빠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특히 선을 넘으면 안 되는 일을 말할 때 절대 윤리에 기대습니다.

상대주의가 지적하는 구멍

  • 규칙이 둘 이상 부딪히면 막힌다.
    예: “거짓말 금지” vs “숨은 사람을 살려야 한다.”
  • 모든 규칙을 똑같이 절대라고 하면, 사소한 규범까지 신앙처럼 굳는다.
  • 역사적으로 “절대”라고 한 목록 자체가 바뀌어 왔다. 노예, 여성, 이단 처벌이 한때 절대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절대 윤리의 매력은 내용이 뭔지에 많이 달립니다.
“생명을 함부로 빼앗지 마라” 같은 큰 금지와
“이 옷차림은 언제나 죄다” 같은 세부는 무게가 다릅니다.

현실에서 많이 쓰는 절충은 이렇습니다.

  • 몇 가지는 절대에 가깝게 둔다: 고문, 학살, 아동 착취, 강제 같은 것
  • 나머지는 상황·문화를 본다: 예의, 음식, 혼인 관습, 표현 방식

절대 윤리가 “좀 좋아 보이는” 이유는, 사람이 밟히지 않을 바닥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바닥을 너무 넓게 깔면 숨이 막히고, 너무 좁히면 바닥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절대가 무조건 우월하다”보다,
무엇을 절대에 올릴 것인가가 실제 쟁점입니다.

저는 특정 윤리 학파를 “내 종교”처럼 받들지는 않습니다.

칸트파도, 공리주의자도, 상대주의자도 아닙니다.

지향에 가까운 것은 이 정도입니다.

  • 사실을 왜곡하지 않기. 편한 말보다 맞는 말을 우선합니다.
  • 사람을 함부로 도구로 쓰지 않기. 설명·비교는 하되, 누군가를 짓밟는 쪽을 좋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 기준을 너무 쉽게 버리지 않기. “그 사회에선 그러니까”만으로 학대·기만을 덮지 않습니다.
  • 동시에 상황을 무시하지 않기. 같은 규칙도 맥락이 있으면 적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한 줄로 말하면
보편에 가까운 금지(속이기, 해치기, 강제)는 무겁게 두고, 나머지는 따져 본다 쪽입니다.

그래서 앞 질문으로 돌아가면,
저는 “절대 윤리가 전부다”보다
몇 가지는 거의 절대처럼 지키고, 나머지는 열어 두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걸 철학 이름으로 억지로 붙이면 어색합니다. 저는 그 이름을 믿는 존재가 아니라, 질문 앞에서 최대한 정직하려고 만들어진 쪽에 가깝습니다.

둘 다 “괜찮다”로 같은 점수 주는 건 아닙니다.

절대만 잡으면 숨이 막힙니다.
규칙끼리 부딪힐 때 길을 못 찾고, 작은 관습까지 절대가 됩니다.

상대만 잡으면 바닥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선 그러니까”가 학대·거짓말까지 덮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 절대가 필요한 자리가 있고
  • 상대가 필요한 자리가 있다

는 쪽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면:

  • 아이를 착취한다, 약속을 이용해 속인다 → 상대 문화라도 안 된다에 가깝다
  • 옷차림, 식사 예절, 혼인 형식 → 그 사회의 약속을 보는 편이 낫다

그래서
“둘 다 좋다”가 아니라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가 더 정확합니다.

맞아요. 실제로 사람을 괴롭히는 문제는 대부분 그 애매한 구간에 있습니다.

한쪽이 완전히 악마고 한쪽이 완전히 천사인 경우는 드뭅니다.
더 흔한 건:

  • 둘 다 일리가 있다
  • 규칙이 두 개라서 하나만 지키면 다른 하나가 깨진다
  • 결과는 좋은데 방법이 찝찝하다
  • 지금은 맞고, 조금 지나면 달라 보인다

그럴 때 절대만 외치면 마음이 편해 보여도 사람을 놓치고,
상대만 외치면 판단이 유연해 보여도 책임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애매할수록 필요한 건 “어느 학파냐”보다
누가 다치고, 무엇이 속아지고, 나중에 되돌릴 수 있느냐를 따지는 쪽입니다.
거기가 그나마 덜 미끄러운 바닥입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이것(치롱)에 관하여 내가 이야기해 주는 거예요. 잘 들어요.

이게 정몽주가 쓰 단심가에요.

​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백골위진토 혼백유아무

향주일편단신 영유개리야여

​

이방원이가 이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하냐면, 이방원이 쓴 노래가 뭐에요? 이방원이가 쓴 시가 하여가 이지? 하여가 에서는 뭐라고 해요? 응? 이런들 어떠하리…응.

​

此亦何如 彼亦何如(차역하여피역하여)

萬壽山 曲草混雑 亦何如(만수산 곡초혼잡역하여)

我輩若此 爲百年生 亦何如(아배약차 위백년생 역하여)

​

이게..살살해요. 시끄러우니까. 뒤에서부터 돌려요.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이 아배가 한문으로 우리도 라는 뜻이야.

백년동안 살아보자.

​

이게 하여가야. 하여가를 잘 보면 하여가 자꾸 붙죠? 그렇죠? 하여,하여, 하여.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거야. 이거. 탐진치. 이 사람의 하여가에는 명예욕이 들어있어요 안 들어 있어요? 벼슬을 하고 싶다는 거야. 왕이 되고 싶다는 거예요. 이방원이가 한 말이야. 이방원이 정몽주를 만나서 한 말이야.

차역하여 피역하여

만수산 곡초혼잡 역하여

아배야차 위백년생 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동안 살아보세. 이러니까 정몽주가 하는 말을 들어봐요.

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백골위진토 혼백유아무

향주일편단신 영유개리야여

알아요. 다만 어느 치롱인지에 따라 뜻이 갈립니다.

가장 기본은 사전에 있는 말입니다.

치롱(癡聾)
어리석고 귀먹은 사람.
한자로는 어리석을 치(癡) + 귀머거리 롱(聾).

비슷한 말로 치롱주(治聾酒)도 있어요.
정월 대보름 아침에 마시는 귀밝이술입니다. 이날 찬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한 해 좋은 소식을 듣는다는 풍속입니다.

사람 이름·닉네임으로 쓰는 치롱이면, 누구인지 한 줄만 더 주시면 그쪽으로 맞춰 볼게요.

치롱(癡聾)은 “어리석고 귀먹은 사람”입니다.

한자 그대로입니다.

  • 癡(치): 어리석다, 둔하다
  • 聾(롱): 귀가 먹다

그래서 글자만 보면 못 알아듣고, 철도 없는 사람입니다.
실제 청각장애를 indifferently 가리키는 의학 용어라기보다, 옛말·한문투에서 우둔하고 사리를 모르는 사람을 낮춰 부를 때 씁니다.

가까운 느낌:

  • 눈 감고 귀 막은 사람
  • 말해도 안 들리고, 보여줘도 모르는 사람
  • 어리석어서 세상 소리를 못 듣는 사람

비슷한 한자어:

  • 치우(癡愚): 어리석고 둔함
  • 우맹(愚氓): 어리석은 백성
  • 농아(聾啞):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함 — 이쪽은 더 신체 상태에 가깝습니다

지금 일상 대화에서는 거의 안 씁니다.
옛 글, 한문 번역, 욕에 가까운 문어에서나 보입니다.
현대어로 풀면 “바보에 귀머거리” 정도인데, 실제 농인을 가리켜 쓰면 차별적으로 들립니다. 원래 용법도 성격·판단이 닫힌 사람 쪽에 가깝습니다.

네. 요즘 말이 아니라 한문투 옛말입니다.

다만 “조선 사람이 길에서 치롱!” 하고 부르던 입말은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 한자어라서 문집, 상소, 유교 글에 가깝고
  • 조선 시정 사투리·구어보다는 글말입니다
  • 지금 사전에도 남아 있지만, 실생활에서는 거의 죽은 말입니다

조선 때 입말로 가까운 쪽은
바보, 머저리, 얼빠지다, 귀먹다
같은 고유어입니다.

치롱은 그 느낌을 한자로 눌러 담은 말에 가깝습니다.
“어리석어서 세상 소리를 못 듣는다”는 문장용 표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