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통한 전 세계적 소통과 인간관계의 본질
미국에 있는 사람들도 이 강연을 시청합니다. 유튜브는 전 세계적으로 어떤 영상이든 볼 수 있게 하므로, 팬들이 꾸준히 시청하는 것입니다. 지난 강연에서 살면서 네 가지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체 관리, 마음 관리, 백공 관리, 지옥 관리입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직생활이나 인간관계에 있어 어떻게 하면 원만하게 잘 이끌어갈 수 있을까요? 인터넷 자료를 보니 인간관계에 실패한 사람들의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남의 등 뒤에서 뒷담화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둘째, 감사하다는 말을 적게 합니다. 셋째, 대화할 때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신체를 관리하면서 어떻게 상대방과 인간관계를 잘 풀어나갈 수 있을까요? 상사, 동료, 부하와의 관계, 그리고 하늘궁과 같이 상하관계 없이 자원봉사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생길 때 인간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 즉 99%는 이기주의적인 성향이 있어 항상 사람을 대할 때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지 먼저 생각합니다. 이기주의자들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쾌락주의 사회와 희락의 길
정직하게 살아온 한 여성이 대기업에 입사했습니다. 술, 담배를 멀리하며 정직하게 살았지만, 직장 상사들은 계속 술자리에 부릅니다. 여성이 술을 계속 거절하자, 결국 한 잔을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한 잔만 마시고 더 이상 마시지 않자, 상사들은 그녀를 분위기를 깨는 사람으로 몰아갑니다. 직장인들끼리 어울려야 하는데,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앉아만 있는 것이 분위기를 해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을 불사르더라도 쾌락 문화에 젖어야 서로 쾌락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이 여성은 희락주의자입니다. 희락주의자가 쾌락주의자와 섞이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고 느낍니다. 타락한 인간들 사이에서 생존하려면 자신도 타락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대다수 국민의 90%는 타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타락 위주의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술 매출, 주세 등 술에서 나오는 세금이 많고, 많은 영세 소상공인들이 술집을 운영하며 술을 팔아 수입을 올립니다. 식당에서도 밥만으로는 돈이 남지 않아 맥주나 소주를 팔아야 매출이 올라갑니다. 술 장사가 식당과 겸해지는 문화에서 이 여성과 같은 사람들은 장사가 되지 않고 소비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여성은 사회에 적응해야 할지, 아니면 사회를 이끌어야 할지 고민합니다. 마시고 먹는 문화 외에도 다른 레크리에이션이나 건전한 식사 문화가 있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주색잡기가 만연합니다. 우리 문화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 여성은 대인관계에 있어 치명적인 상황에 놓입니다. 결국 술을 허용하고 한 잔을 마시게 됩니다. 계속되는 권유에 져서 결국 술꾼이 됩니다. 상사들이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자, 자신도 진급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는 신입사원이 자신에게 술을 따르지 않으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신입사원 역시 술을 마셔야 하는지에 대해 반항합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술로 푸는 것에 익숙해져 다른 방법으로 풀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스위스 같은 나라의 국민들은 술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합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성숙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99%가 넓은 길로 가고 1%만이 좁은 길로 갑니다. 1%만이 희락으로 가는 것입니다. 쾌락은 엄청난 대가를 뒤따르게 합니다. 쾌락은 남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에 희락은 자신이 고통을 받고 남을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랑의 여덟 가지 필수 조건: 희락에서 절제까지
희락에는 사랑의 필수 조건이 따릅니다. 사랑이 하나 있으려면 여덟 가지 요소가 있어야 사랑이 완성됩니다. 사랑이 있으려면 가장 먼저 희락이 있어야 합니다. 희락이 있을 때만 사랑이 가능하며, 쾌락이 있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와 술 마시고 놀아나고 술 접대를 받는 것은 희락이 아닌 쾌락입니다. 쾌락에는 타락이 붙어 있습니다. 도덕적인 타락이 붙어 있으면 떨어지는 것입니다.
희락은 사랑의 첫 번째 요소입니다. 희락 다음에는 화평이 있어야 합니다. 쾌락 아래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술을 함께 마시면 직원들 사이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부장은 그 사람을 나쁜 놈으로 여기고 괘씸죄로 인해 평화가 아닌 공포와 불안이 찾아옵니다. 화평이 오려면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욕을 듣더라도 함께 싸우면 화평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불리해도 참아야 합니다.
인내의 열쇠는 자비입니다. 자비가 없으면 자신에게 욕하는 사람을 참을 수 없습니다. 저 사람이 어릴 때 부모 없이 교육을 받아서 저런가 보다 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자비심이 있을 때만 인내가 생깁니다. 저 못된 놈이라고 생각하면 인내가 생기지 않습니다.
자비는 양선에서 나옵니다. 선을 추구하는 선량함에서 자비가 나옵니다. 악한 사람에게서는 자비가 나오지 않습니다. 양선이 있을 때 자비가 시작됩니다. 양선의 핵심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에서 자비심이 나옵니다.
양선은 충성에서 나옵니다. 충성심을 가질 때 임금 앞에서 양선해집니다. 충성심이 있을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충성심은 온유에서 나옵니다. 온유할 때 충성심이 나옵니다.
온유는 절제에서 나옵니다.
이러한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절제의 어머니는 온유입니다.
온유의 어머니는 충성입니다.
충성의 어머니는 양선입니다.
양선의 어머니는 자비입니다.
자비의 어머니는 인내입니다. 자비를 시험하는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의 어머니는 화평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화평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 인내심이 없는 것이고, 인내가 있을 때 화평이 옵니다.
화평은 희락의 어머니입니다. 마음이 화평해야 희락이 가능합니다. 싸우면서 희락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불안할 뿐입니다.
희락의 어머니는 사랑입니다.
조건부 사랑과 정오의 시대
요즘 사람들은 이 여덟 가지 요소가 없는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랑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정오 때문입니다. 사랑했는데 왜 배신했느냐며 모든 것이 시비 거리가 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고 “나는 당신을 사랑했는데 왜 배신했느냐”고 말합니다. 장희빈이 임금을 사랑했고 임금도 장희빈을 사랑했지만 결국 싸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정오를 동반합니다.
희락이 있는 곳에 쾌락이 있고, 화평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평화는 전쟁과 같은 것입니다. 화평은 전쟁이 없는 평화를 의미하고, 평화는 전쟁이 있을 때만 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이쪽(희락, 화평)을 택하려면 이 길을 가야 합니다. 99%의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은 쾌락과 평화의 길이고, 1%의 사람들이 가는 좁은 길은 희락과 화평의 길입니다. 성경에서도 좁은 길로 가야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예전에는 철학 강의와 인문학 강의를 많이 했지만, 요즘은 영성 강의만 합니다. 이 말은 우스워 보이지만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요즘 사람들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입니다. 이를 정오라고 합니다. 정오가 포함된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해 준 것에 대한 대가가 없을 때는 언제든지 복수가 나옵니다. “당신, 내가 평생 밥해 줬는데 뭐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당신은 나를 사랑해 준 게 전부 조건이 있었네”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부자지간도 조건부 사랑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조건부 사랑이 습관화된 사회는 망해가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이를 말세라고 부릅니다. 이 말세에 제가 와서 여러분들에게 체계적인 강의를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가 시작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모든 사람과 모든 종교인들을 한꺼번에 바꿀 수 있는 강의가 유튜브로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한다면서 정오를 하고 있습니다. 희락을 느껴야 하는데 쾌락 위주로 살아갑니다. 쾌락은 말년이 비참해집니다. 희락은 말년이 좋습니다. 불교에서 업보라고 할 때 과보와 업보가 있습니다. 과보는 외면적인 죄에 대한 보상이고, 업보는 내면적인 죄에 대한 보상입니다. 업과 보는 인간을 따라다닙니다. 인과에는 반드시 업보가 따릅니다. 이를 인과응보라고도 합니다.
겸손과 온유의 차이, 그리고 영혼의 진화
겸손과 겸양은 양선에 가깝습니다. 양선은 겸손과 겸양을 포함합니다. 충성도 사랑의 씨앗입니다. 충성은 임금에게 온유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가 충성의 핵심입니다. 임금 앞에서 칼을 들고 궁녀가 몇 명이냐고 따지는 것은 온유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예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겸손은 온유보다 낮은 개념입니다. 겸손은 다른 말로 예의를 지키는 행위입니다. 온유한 것과는 다릅니다. 겸손은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행위입니다. 아버지 제사 때는 겸손하지만 친구들 앞에서는 겸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겸손은 성품이 아닙니다. 온유는 언제나 붙어있는 성품 자체입니다. 겸손은 행위이므로 상대가 무례하게 행동하면 되들 수 있습니다. 마치 부부가 사랑했지만 배신하면 되들듯이 말입니다.
겸손이나 겸양은 양보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겸손지덕은 없지만 겸량지덕은 있습니다. 겸손은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있는 자리에서는 겸손해지지만, 아랫사람이 있으면 무례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온유를 인(仁)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을 의미합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인과 애는 모두 사랑을 의미하지만, 인은 일반적인 사랑과 자비심을 포함합니다. 겸손과 온유는 차원이 다릅니다. 노래 가사처럼 “열아홉 처녀 때는 수줍던 아내가 호랑이로 변했네”라는 말처럼, 결혼 전에는 겸손했지만 결혼 후에는 호랑이로 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겸손은 내적인 성품이 아니라 외적인 행위입니다. 온유는 타고난 성품입니다. 겸손은 성품이 아닙니다. 이 언어의 구분이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온유와 겸손, 겸양을 구분하기 어려워합니다.
사랑은 정오입니다. 21세기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오하고 있습니다. 누가 정오를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사랑한 기간이 길수록 정오가 더 강해지는 부부 관계도 많습니다. 미지근하게 사랑해야 헤어질 때도 미지근하게 헤어질 수 있고 오래갈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할 때는 여덟 가지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 책임을 갖추면 조직 사회에서 성인 칭호를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몸에 배면 세상 사람을 항상 긍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피해를 보더라도 합의하고 끝내지, 고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나로 인해 생긴다고 생각하므로, 남과 다투는 일이 있어도 빨리 풀고 먼저 손을 내밀어 끝냅니다. 소송은 하지 않습니다.
영혼 진화의 불가능성과 신의 은총
사람들의 영혼은 진화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등 많은 종교가 영혼을 영적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불가능합니다. 신은 바코드를 은총으로 주어 성령을 넣어주고 축복을 줍니다. 그러면 신화된 인간들은 변화합니다. 노력한 사람도 나아지지만, 이는 신이 주었기 때문에 나아지는 것이지, 노력해서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나 불교는 노력한 만큼 모여서 얻는다고 하지만, 지구는 위에서 무상으로 주는 것입니다. 무수상 보시입니다. 주니까 사람들이 바뀌고 따라오는 것입니다. 축복과 은총을 그냥 주는 것입니다. 돈 몇 푼 받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고, 실제로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몸에서 절대 에너지가 나와 능력자로 만들어줍니다. 스스로 도통해서 그렇게 되려면 몇천억 년이 걸립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러한 것들은 일반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쾌락 속에 있습니다. 지구는 영적 문명 수준이 가장 낮은 행성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에 와 있는 것입니다. 많이 진화된 곳에는 제가 갈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떠들어 놓으면 지구 전체에 유튜브로 퍼져나갑니다. 제가 유튜브 시대에 온 이유입니다. 예수는 유튜브 시대에 온 사람이 아닙니다. 이 강연이 퍼져나가면 종교들이 헛다리 짚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유럽의 수도원들은 옛날에 수백, 수천 명씩 있던 곳이 몇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시대가 변했고 종교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왔으니 이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관계의 원만함과 완벽주의
아까 질문했던 인간관계를 어떻게 원만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만’이라는 말은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원’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원만은 완벽을 의미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 완벽을 기한다는 것입니다. 완벽이 원만입니다. 이 원만은 꽉 찼다는 의미입니다. 완성된 것이 꽉 찼다는 것입니다. 원만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하늘과 땅의 이치에 부합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늘에는 원만하게 부합하고 땅에는 이치에 부합해야 합니다. 이는 대단히 높은 경지입니다. 원만은 완벽주의를 의미하며,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대인관계가 완벽한가요? 1%짜리입니다. 99%는 타락과 쾌락입니다. 우리는 진리에서 보편타당한 것을 진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악의 진리입니다. 10명 중 9명이 상투를 하고 있으면 상투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10명 중 9명이 상투를 잘라버리면 노인들도 상투를 하지 않기 시작합니다. 보편타당한 진리를 따라간 것입니다. 상투를 하고 다니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생각은 문화에 휩쓸려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보편타당하게 100명 중 60%가 술을 마시면 술을 마시는 것이 정상이고, 안 마시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투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 대다수가 어리석을 때는 뽑힌 사람도 어리석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