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75 The Meal of Life and Death: A Wedding with Nature – August 31, 2022

식사는 생사이며 자연과의 결혼식

대한민국 국민들, 나아가 전 세계인들은 살아가면서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하는 공통적인 행위가 바로 식사입니다. 우리는 식사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식사는 음과 양의 호흡과 같습니다. 음식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은 양이고, 약물은 음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신은 중간자 역할을 하며 움직입니다. 밥을 먹는 것도, 호흡하는 것도 모두 음과 양의 조화입니다.

육체를 유지하는 음양과 중성자의 역할

육체를 유지하는 것은 음양의 조화입니다. 그러나 음양만으로는 알맹이가 없습니다. 양자와 전자가 있듯이, 중성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삼극(三極)이라 부릅니다. 먹고 잠자는 것은 동물적인 행위이지만, 먹고 숨 쉬는 행위에는 호흡하는 영혼이 함께합니다. 인간만이 음양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곤충이나 다른 생명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위에는 정신의 도리, 즉 성품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성품이 본능을 이끌고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주와 인체의 음양 이치

식사, 수면, 호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인체는 음양으로 존재하지만, 우주에는 음양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태극권을 벗어난 우주에는 음양 자체가 없습니다. 신의 이치만 있을 뿐, 음양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주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 세계에 음양이 있으니 밖의 세상에도 음양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부분적인 것과 전체적인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부분적인 것은 음양의 이치 안에 있지만, 우주 전체를 볼 때는 호흡이나 성주괴공이 없습니다. 우주는 밥을 먹을 필요도, 움직일 필요도 없습니다. 성주괴공은 오직 지구에서만 존재합니다. 지구를 벗어나면 영원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성주괴공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만들어졌다가 없어지는 것이 반복되는 것이죠. 인간의 수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지구의 질서인 성주괴공이 우주에도 있을 것이라 착각하지만, 우주에는 성주괴공이 존재하지 않고 영원만이 존재합니다.

식사와 호흡의 중요성: 정신의 중도

우리 인체는 부분적으로도 성주괴공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식사와 호흡을 잘해야 합니다. 호흡과 식사가 맞지 않을 때, 밥이 허파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밥을 먹거나 숨을 쉴 때 마음이 딴 데 가 있거나 놀랄 일이 생기면 밥이 허파로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불균형이 인체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잘 먹는다는 것은 잘 생각하며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의식적으로 먹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식사할 때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음양의 근본 이치입니다. 과하거나 부족한 것 모두 중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맛있다, 맛없다며 이분법적으로 음식을 대하면 몸은 쓰레기통이 되고 중환자가 됩니다. 정신이 가운데 자리 잡고 있을 때, 음식이 생명에 도움이 됩니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생각하며 먹느냐, 정신을 차리고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맛에만 치중하여 음식을 먹는 자는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음식과 공생의 삼극 이치

음식과 공생하는 데는 세 가지 이치가 있습니다. 음, 양, 그리고 삼극입니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우리 몸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천수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모든 지식과 정신을 쏟아 중도를 지키고, 자유와 의례를 잊지 않으며, 정신을 집중하여 식사량을 조절하고 많이 씹어야 합니다. 부모님의 말씀, 건강 상식 등을 떠올리며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가장 성스러운 행동이며, 자연과 내가, 우주와 정신이 결합하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결혼식과 같습니다. 배추나 양배추와 내가 결합하는 것이며, 음식과 내가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음식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음식 따로, 내 감정 따로, 내 몸 따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루에 세 번 이 위기를 맞닥뜨립니다. 무심코 먹는 식사는 하루 세 번씩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이때 자신의 의지를 가장 높여, 이 음식이 자연과 우주, 인간이 동시에 만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늘, 땅, 사람이 협력하여 만든 이 음식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이것이 내 몸으로 들어와 서로 상생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호흡이 들어오고 정신이 이를 통제해야 중도적인 식사가 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많이 먹는 것은 나중에 자기 몸에 독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세 번 전쟁을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삼극 무진본과 중도의 지혜

삼극이 만나 무진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멸본이 되어버렸습니다. 서양은 음양을 따르지만, 우리는 한 수 더 나아가 항상 중도를 바라봅니다. 음과 양이 싸우는 원리 가운데서 중도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지켜보고 있습니다. 중도가 중요합니다. 음식도 맛있다, 맛없다로만 판단하면 몸은 쓰레기통이 됩니다. 맛도 중요하지만 몸도 중요하고, 호흡도 중요합니다. 마스크를 썼다고 내가 안전한 것이 아니라, 남도 마스크를 써야 안전합니다. 전체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마스크를 써도 가족은 안전할 수 없습니다. 남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한 것입니다. 남은 다 죽고 나만 살 수는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가 이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개인적인 삶은 큰 영향을 주지 못하며, 공동체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개인주의는 환경을 망가뜨립니다. 집단의 건강, 공동체의 건강이 곧 나의 건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공동체 의식과 식사의 의미

농약을 뿌려 농사지어 도시 사람들에게 팔고, 그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병에 걸린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농사짓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건강을 생각해야 내가 건강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적인 가치를 가지면 음식을 먹을 때 농부, 요리사, 아내, 태양빛, 하늘, 물 등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의식이며, 인간에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음식이 몸에 들어와 삼극 무진본의 이치로 나와 음식이 하나가 됩니다. 내가 이 음식을 먹는 것도, 내가 건강해야 남에게 전염병을 옮기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먹어야 합니다. 나만의 입맛을 생각해서 밥을 먹는다면 오래 살 수 없습니다. 남과 함께 먹어도 남의 건강을 생각하고, 밥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먹을 때 이 밥이 보약이 됩니다. 항상 다방면으로 공동체를 생각해야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것도 도를 닦는 것입니다. 밥 한 그릇이 내 식탁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바람과 정성이 들어갔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온 밥 한 그릇은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식사를 단속하고 경솔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식사는 생사이며 자연과의 연애

식사는 다른 말로 생사(生死)입니다. 밥상 앞에서 농부는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 농약을 뿌려 농사를 지으면 도시 사람들은 모두 병들게 됩니다. 식사는 생사입니다. 밥을 받고 생각하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본심으로 돌이켜, 이 식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재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있을지 생각하며, 내가 이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도둑질해서 먹는 것은 아닌지 모든 것을 잘 살펴야 합니다. 밥을 먹기 전 잠시 묵념하는 것은 죽은 행위입니다. 정말 무엇을 하는 법을 배울 때 맛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맛이 없어도 요리사의 입장을 생각하고,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야 합니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람의 도덕성, 윤리성, 모든 것이 나타납니다. 음식을 마주할 때 어린아이처럼, 동물처럼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한 번 먹을 때마다 깊은 상념에 잠겨야 합니다.

자연의 섭리와 음식의 가치

우리가 바위를 깨고 흙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었을까요? 수천 년, 수백 년 동안 비바람이 바위를 녹여 흙을 만들었습니다. 그 흙으로 농사를 짓는 것은 덕담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흙 속에는 중금속과 석회 성분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을까요? 수십 년간 순화되어 독성이 날아간 흙에서 씨앗이 싹을 웁니다. 우리는 밥을 먹을 때마다 이 위대한 흙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흙을 만들어 밥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밥을 받아 먹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 밥을 먹고 세상을 사는가, 내가 이것을 먹고 남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와인을 마실 때 농부의 노고를 생각하며 깊이 음미합니다. 발효시키는 과정을 떠올리며 향을 느끼고 천천히 마십니다. 음식은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음식을 진인의 심정으로 먹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을 때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음식을 먹고 얻은 좋은 기운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책임감을 갖고 먹어야 합니다. 밥 한 그릇을 먹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일입니다. 식사할 때 맑고 감사한 기도를 먼저 해야 합니다. 식사는 생사입니다. 그 음식이 내 몸으로 들어갈 때는 죽는 것과 같습니다. 부서지고 깨지고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러나 그 죽음으로서 또 살아납니다. 생사는 서로 교환하는 것입니다. 음식은 나에게 보람을 주고, 나는 음식을 먹어주는 보람이 있습니다. 서로 교환하며 자기 가치를 높이고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식물이 동물로 바뀌는 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육식의 문제점과 천연 계면활성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 치킨은 공장식으로 키워지면서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동물의 카르마가 인간에게 전이될 수 있습니다. 동물들이 고통을 겪을 때 독소가 만들어지고, 그 독소가 염색체와 유전자에 들어가 우리가 먹게 됩니다. 야생 닭은 독소가 없지만, 죽일 때도 고통 없이 순식간에 죽여야 합니다. 동물을 먹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지만, 우리 인체는 계면활성제가 있어야 융합됩니다. 계면활성제는 어머니의 초유, 해조류에 가장 많습니다. 초유에는 지방과 단백질이 융합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는 기름과 물이 분리되어 섞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동물성 기름은 혈관을 약화시킵니다. 육식은 인간에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공장식 사육 환경에서 고통받는 동물의 독소가 염색체와 DNA에 들어가 인간의 성질을 난폭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절대 인간은 닭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계란은 괜찮습니다. 계란에는 천연 계면활성제가 들어있어 지방, 단백질, 탄수화물이 모두 융합되어 있습니다. 모유, 우유, 계란 등은 천연 계면활성제가 있어 몸에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계면활성제는 다릅니다. 동물 고기는 계면활성제가 없어 혈관을 약화시키고 췌장에 무리를 줍니다. 엄마 모유를 먹는 아기는 췌장에 무리가 없습니다. 발효된 음식, 숙성된 고기는 어느 정도 계면활성제가 되어 몸에 좋습니다. 몽골 사람들이 고기를 숙성시켜 먹는 것도 이러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가짜 고기나 맛에만 치중한 고기는 몸에 독이 됩니다. 동물들의 비명 소리가 몸속에 들어가 난폭한 성질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답게 사는 방법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