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지혜: 설악산 지도와 직접 등반의 차이
우리가 공부를 가르칠 때, 사람들이 어떻게 공부하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아무리 허경영 강연을 듣고 전 세계 인터넷으로 본다 해도,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소리를 내어 가르치는 유정설법은 설악산 지도를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도를 설명하는 것이지, 여러분을 설악산에 직접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설악산에 직접 올라가 봐야 합니다.
학생들을 모아놓고 지도를 보며 우주를 설명하는 교육은 설악산을 직접 가본 사람과 지도를 본 사람의 차이만큼이나 엄청납니다. 지도를 보고 공부하는 사람은 ‘지(知)’에 머무릅니다. 이는 지식(知識)의 ‘지’와 같습니다. 하늘을 가린 지식은 말로만 아는 것이지, 실제 행동으로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반면 직접 가본 사람은 ‘해(慧)’를 얻습니다. 지혜(智慧)는 날마다 겪어야 하는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은 하늘을 눈으로 가린 것과 같지만, 지혜는 생활 속에서 응용하고 실천하여 얻어집니다.
‘나’를 버리고 ‘우리’를 지향하는 삶
우리가 공부를 통해 지혜를 얻으려면 생활 속에서 응용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남에게 화내지 않고, 남을 오해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내세우면 세상이 독이 되고, 남과 원수가 되며,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라는 의식을 가지면 달라집니다. ‘우리 땅’, ‘우리 서울’, ‘우리 가족’이라는 생각은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거나 공장 폐수를 몰래 버리는 행위를 막습니다. ‘나’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결국 세상을 오염시키고 망하게 합니다.
지식으로 포장된 삶은 노력하여 지혜로 바뀌어야 합니다. 성경이 한문에서 나왔다는 말처럼, 우리 민족이 만든 글자에는 하늘의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하늘을 살짝 가리면 화살 시(矢)가 되고, 하늘을 기울이면 요절할 요(夭)가 됩니다. 이는 하늘의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재앙을 맞는다는 의미입니다. 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어 옷을 입게 된 이야기, 노아 방주에 여덟 명이 탔다는 배 선(船)자 등 모든 한문은 성경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인류 문명의 뿌리: 아덴과 아시아
모든 한문은 만 년 전에 나왔고, 성경은 6천 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민족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에서 왔으며, 그곳은 이스라엘이 있는 곳입니다. 천산맥을 거쳐 중국 태백산에 도읍을 정했는데, 수메르 지역의 이름이 ‘아덴’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에덴’이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아’자가 붙는 지명은 모두 아덴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 최초의 수도인 아사달에도 ‘아’자가 붙습니다.
‘아’자는 이슬람교와 유교의 마크에도 사용됩니다. ‘아’자를 자세히 보면 십자가에 하늘과 땅을 그려 넣은 형상입니다. 불교의 마크 또한 중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PX 마크를 사용하고, 유대교는 일곱 촛대인 다윗의 검을 마크로 사용합니다. 이 모든 종교의 상징은 우리 민족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템플’은 원래 ‘사원’이었고, ‘처치’로 바뀌어 ‘교회’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모든 성당은 원래 사원이었습니다. 예수의 혈통 또한 우리 한민족의 혈통과 연결됩니다.
숟가락과 혓바닥: 지식과 지혜의 비유
‘나’를 강조하면 숟가락과 같습니다. 숟가락은 아무리 음식 속에 있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지식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혓바닥은 말이 필요 없는 무정설법을 통해 맛을 즉시 터득합니다. 소나무를 보고 그 고독함을 느끼고, 돌고래의 몸부림을 이해하는 것이 혓바닥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나무를 만든 사람의 노고를 생각하고 환경을 아껴야 합니다. 가구가 너무 많아 밀림이 파괴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나’가 아닌 ‘우리’라는 의식으로 미래를 내다봐야 합니다. 모든 세계 종교는 하나입니다. 불교의 무아(無我) 신앙과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무아는 ‘나’를 매일 죽여 없애고 거듭나는 것이며, 부활 또한 매일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아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종교의 본질과 사회적 역할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6천 개의 학교를 세웠고, 불교는 60개의 학교를 세웠습니다. 기독교는 ‘교(敎)’를 내세워 가르침을 통해 지식을 전파하는 데 주력했고, 불교는 ‘선(禪)’을 내세워 수행과 체험을 통해 지혜를 얻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지식 위주의 교육은 양심적인 사람을 만들지 못하고 도둑놈을 양산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인도에 가서 명상을 하는 것은 동양의 지혜를 배우려는 노력입니다.
‘나’라는 숟가락을 내세우면 아무것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불교의 무아는 ‘무자기아(無自欺我)’와 같습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는 실 한 가닥은 약하지만 열 가닥이 모이면 끊을 수 없는 힘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구인들은 개인 플레이를 멈추고 ‘우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유성진리와 무성진리: 소리와 침묵의 진리
제가 소리를 내어 가르치는 것이 유성진리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소리 없는 무성진리로도 존재합니다. 바위 하나를 보더라도 수억 년의 족보를 파고들면 그 바위를 만든 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바위가 물에 가라앉는 것을 통해 만유인력을 깨닫고, 우리가 지구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무성진리입니다. 아파트에 심어진 소나무를 보고 그 고독함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배고플 때 먹여주고, 박해받을 때 구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길거리의 거지와 가난한 자, 집 없는 자 모두가 하나님의 분신입니다. 그들에게 베푼 덕이 곧 자신에게 돌아오는 복입니다. 복을 현생에 다 써버리면 다음 생에 불행한 인간으로 태어나 귀신이 됩니다. 불교의 육도윤회에서 지옥은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 즉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강경의 가르침: 모든 것은 허망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언젠가 남에게 벗어주기 위함입니다. ‘나’만을 내세우면 부활도 무아도 없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자기를 색(色)으로 바라보거나 소리(聲)로 판단하면 진리를 모르는 사도(邪道)를 쫓는 자이며, 결코 천사를 만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금강경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은 이 세상의 모든 법은 꿈이요, 환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물을 무상하게 바라볼 때, 우리는 후손을 위해 환경을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숟가락과 혓바닥, 그리고 균형
숟가락 같은 학생은 천 가지를 가르쳐도 한 개를 기억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혓바닥 같은 학생은 하나를 가르치면 천 가지를 깨닫고 행동이 바뀝니다. ‘밸런스(Balance)’라는 단어 하나를 가르쳐주면, 아이는 엄마 아빠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공부와 운동의 균형을 맞추며, 가족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이 됩니다.
사람을 외모나 성별, 지위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처럼,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는 불균형에서 비롯됩니다. 부자들은 그만큼의 고생을 통해 돈을 벌었으므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부자를 무조건 나쁘게 보는 시각을 버려야 합니다. 부자들은 세금의 70%를 내며 사회를 유지하는 데 기여합니다.
종교의 자유와 국민의 권리
불교의 무아와 기독교의 부활은 같은 신앙입니다. 모든 종교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며, 불상이나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비난하고 자신들의 종교만이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종교를 전도할 때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국민의 3대 권리는 생존권, 소유권, 평등권입니다. 일조권 침해나 재산권 침해는 이 권리들을 위협하는 행위입니다. 민주주의 3대 원칙은 행복 추구의 원칙, 인간 존엄의 원칙, 절대 공평의 원칙입니다. 자본주의 3대 원칙은 소유권의 절대 원칙, 계약 자유의 원칙, 과실 책임의 원칙입니다. 이러한 권리와 원칙들은 개인의 삶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합니다.
술과 물: ‘나’와 ‘우리’의 상징
‘나’를 많이 내세우는 사람의 특징은 술과 같습니다. 술은 인화성을 가지고 위로 올라가며, 많이 마시면 건강을 해치고 인생을 망칩니다. 술은 무지를 상징하며, 씨를 남기지 않고 다 태워버립니다. 반면 ‘우리’를 내세우는 사람의 특징은 물과 같습니다. 물은 유동성을 가지고 낮은 곳으로 흐르며, 마실수록 건강에 좋습니다. 물은 지혜를 상징하며, 흡수성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포용합니다.
젖을 먹이는 여자가 남편과 싸우면 젖이 상하여 아기가 병들듯이, ‘나’라는 고집은 모든 불행의 원인입니다. 물과 같은 여자가 시집오면 모두에게 사랑받습니다. 물은 뿌리가 없고 자유자재하며, 불은 원료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직장에 갇혀 사는 사람은 술을 좋아하게 되고,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물처럼 유동적입니다.
우리는 ‘나’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자존심을 버리고 ‘우리’를 지향해야 합니다. 내 분수를 알고, 남을 배려하며, 사회 전체의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르는 것은 한웅의 부인 ‘여호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갓과 우리의 갓이 같은 것처럼,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걱정은 저절로 생기고, 기쁨 또한 스스로 생깁니다. 행복의 조건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합니다. 우리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행복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걱정으로 인생을 망치고 피를 썩게 하지 말고, 스스로 기쁨을 발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