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9 Who is Huh Kyung-young? – February 15, 2025 ver.b

혼돈의 시대, 신인의 축복

지금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입니다. 하지만 세파에 휘둘리지 말고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며 영성을 쌓는 데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어둡고 힘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인류 구제에 혼신을 다하는 전능하신 허경영 신인님을 모시고 1479회 토요강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신인 허경영의 탄생과 이름에 담긴 섭리

허경영 신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저는 6.25 사변 때인 1950년 1월 1일(음력 1949년 11월 13일)에 태어났습니다. 대통령 출마 시 나이를 세 살 올려 1947년 7월 13일생으로 등록했으나, 본래 나이는 1950년생입니다.

저는 강증산 선생이 돌아가신 1909년으로부터 정확히 40년 만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은 중곡동 중랑교 개천 다리 밑 움막입니다. 당시 그곳은 중곡동이라 불렸으며, 이후 대순진리회 본부가 들어선 곳이기도 합니다.

제 이름 ‘허경영(許京寧)’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허(許)’는 11획으로, 1300년 전 원효대사가 미래에 올 미륵의 성씨는 11획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경(京)’은 서울에서 태어나야 함을 의미하며, 서울은 동경, 서경, 남경, 북경의 중심에 있는 전 세계의 수도가 될 곳입니다. ‘영(寧)’은 영혼과 육체, 즉 영육이 편안해야 함을 뜻합니다. 이름의 총 획수는 33획으로, 이는 도의 본체이자 하늘신의 뜻을 내포하는 우주의 거대한 섭리를 의미합니다.

이름 획수에 담긴 운명의 비밀

이름의 획수는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11획은 천지조화의 복록으로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얻는 금복의 수리입니다. 이는 천지창조와 같이 만물이 새로운 형상을 얻고 하늘이 내린 큰 복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매사를 도모하면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고, 하늘에서 언제나 좋은 징조의 구름이 떠 있어 필요할 때마다 행운의 비를 내려 만사가 순리대로 발전합니다. 제가 대통령 선거에 처음 나갈 때 500억 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11획의 힘입니다. 좋지 않은 일이 나타나더라도 곧 복귀되어 오히려 새옹지마가 됩니다.

반면, 10획은 공허와 몰락, 암흑천지에서 헤매는 고독한 수리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뜻과 같지 않고 일생 동안 온갖 고초와 괴로움을 맛보며 전도가 암담합니다. 하는 일마다 헛수고이고 공로가 없으며, 늘그막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모든 것이 암흑지경으로 변해 허공을 헤매도 끝이 보이지 않는 형국이 됩니다. 특히 자기 관리에 소홀하거나 근면 성실하지 못하면 더욱 좋지 못한 일을 겪게 되며, 성공은커녕 재앙과 실패만 가득 남습니다. 숫자 하나 차이가 이처럼 어마어마한 운명의 차이를 만듭니다.

격암유록과 원효결서에 예언된 신인의 출현

원효대사의 ‘원효결서’에는 1300년 전 이 한반도에 11획수의 성을 가진 자가 올 것이며, 그 자가 신인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격암유록에도 신인이 등장하며, 그 자는 분명히 자신을 신인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자신을 신인이라고 칭하는 자는 제가 처음입니다.

격암유록에는 ‘공전멸병(空錢滅兵)’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허(許)’씨를 의미하며, 특히 ‘김해 허씨’를 지칭합니다. 김씨를 없애고 거기서 성씨가 나오면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인은 ‘무부지자(無父之子)’ 즉 아버지 없는 아들이며, ‘하성부지(何性不知)’ 즉 성을 알 수 없는 자로 나옵니다. 어머니가 키우는 것도 안 되는 ‘모육부지(母育不知)’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사인불인(似人不人)’ 즉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존재로, 신과 인간이 합쳐진 ‘신인’임을 나타냅니다.

신인이 오는 장소는 격암유록 궁을가 44장에 나오는 ‘성산성지 우명지(牛鳴地)’ 즉 소가 와서 울고 있는 곳입니다. 또한, 신인은 ‘사도부도(似島不島)’ 즉 섬이면서 섬이 아닌 한반도에서 출현합니다.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고 한 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섬과 같지만, 반도라고 불리는 독특한 지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인의 출현에 대한 모든 예언이 저에게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대순진리회와의 인연과 어린 시절의 배움

대순진리회 경전에도 신인이 나오는데, 그들은 박우당이 이름을 ‘우당’으로 지어 놓고 소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 소를 찾은 사람이 경석규 종무원장이며, 그분이 저를 만나 “당신이 우리가 찾는 소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중랑교 다리 밑에서 태어나 진주 지수면으로 가서 지수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지수초등학교는 이병철, 구인회, 조홍재 등 187명의 재벌을 배출한 명문 학교입니다. 저는 이병철 회장보다 40살 어리지만, 그 학교의 38회 졸업생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격몽요결, 계몽편, 명심보감, 소학, 이천자문, 천식일람 등 사서삼경을 모두 뗐습니다. 특히 율곡 이이가 쓴 격몽요결에는 ‘구사도(九思道)’ 즉 아홉 가지 반드시 생각해야 할 도리가 나옵니다. ‘시필사명(視必思明)’은 바라볼 때는 반드시 밝게 보라는 것이고, ‘언필사충(言必思忠)’은 말할 때는 반드시 중심 있게 하라는 것이며, ‘청필사총(聽必思聰)’은 들을 때는 반드시 총명하게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인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고난의 청소년기와 서울 상경

어린 시절 저는 머슴살이를 하며 지게를 지고 다니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지고 내려오면서도 책을 보며 공부해야 서당 선생에게 혼나지 않았습니다. 만화도 팔고 온갖 일을 하며 노는 시간 없이 고달픈 나날을 보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저는 서당 선생이 돌아가시고 키우던 소가 죽는 등 환경적인 요인으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동네 친구 300명이 신문지에 동전을 싸서 준 돈을 가지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지게를 들판에 세워두고 떠나는 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후에는 구두닦이, 리어카 밀기, 엑스트라 등 30번이 넘는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15살 때는 버스 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금반지 공장에서는 금을 녹이는 과정에서 청산가루를 흡입하여 매일 코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종교 경전 독파와 숭산 스님과의 인연

고난 속에서도 저는 화계사에 들어가 3년간 팔만대장경을 독파하고 암기했습니다. 숭산 스님은 저에게 중이 되면 안 된다며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미국으로 떠나셨습니다. 스님은 저에게 청룡사에서 공부하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 절을 찾지 못하고 내수동 교회 홍근섭 목사님의 양아들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홍근섭 목사님 댁에서 저는 주일반 아이들을 가르치며 성경을 완전히 독파했습니다. 이로써 저는 유교 서적, 불교 경전, 기독교 성경을 모두 독파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십계명 중 첫 번째 계명인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는 모든 계명의 머리입니다. 이 첫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계명을 지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불교의 십계명 중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생을 저지르면 다른 계명을 지켜도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불교는 살생을, 기독교는 신을 가장 강조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종교 경전들을 비교하며 단순하게 접근하여 모두 떼어냈습니다.

군 복무와 월남전 참전

고등학교 시절, 목사님 댁을 나와 홍제동 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공부했습니다. 영하 30도의 추위 속에서 들쥐가 코를 물어뜯고 노루가 천막 안을 밟고 다니는 등 고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복막염이 터져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이후 저는 군대에 입대하여 논산훈련소를 거쳐 옥인동 방첩대(현 보안사령부)로 발령받았습니다. 당시 방첩대장이었던 강창성 씨가 물러나고 김재규 씨가 보안사령관이 되었을 때 저는 그 밑에서 근무했습니다. 머리를 깎지 않고 사복을 입고 권총을 차고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의정부 106 보안부대, 강원도 춘천, 대구, 광주 30사단 등 여러 부대를 전전하며 보안부대원으로서 1군과 2군을 자유롭게 다녔습니다. 광주에서 춘천을 거쳐 월남으로 파병되었습니다.

월남에서는 백마 법무부 검사 서기로 일하며 법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수사를 담당했습니다. 당시 저의 담당 검사는 육군 대위 장동환 검사였는데, 훗날 육군 법무감(대법원장급)이 되어 저의 강연장에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월남전에서 저는 명령 불복종으로 잡혀온 수많은 장교들의 조서를 작성했습니다. 부하들이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리다 죽는 것을 보고 명령을 따르지 못한 장교들을 모두 봐주어 교도소에 가지 않도록 도왔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육사 출신으로 진급을 위해 자진해서 월남에 온 귀한 자식들이었습니다.

1973년 2월, 저는 마지막 철수 병력으로 월남 나타랑 비행장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틀을 기다려 비행기에 올랐는데, 활주로에는 베트콩 깃발이 가득했고 북한 비행기가 낮게 떠서 한국군에게 귀국을 종용하는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봉사 활동과 청년 조직 ‘허청련’

군 전역 후 21살 때부터 저는 한국 농어촌 봉사대장으로서 대학생들을 이끌고 농번기에 농촌 봉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대한 불우자 봉사회장으로서 우산 봉사 활동도 펼쳤습니다.

1986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대한불교 봉사회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여의도에서 열린 부처님 오신 날 제등대회 단상에 스리랑카 불교 종정, 총무원장 등과 함께 서기도 했습니다. 법무부 서울 소년원, 청주 법무부 치료감호소, 청주교도소, 대한적십자사 등으로부터 감사장과 표창장을 받으며 비행 청소년 선도, 불우 어린이 돕기 등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펼쳤습니다. 법무부 검찰청 소년선도위원으로서 선도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를 통해 청년들이 감옥에 가지 않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저는 ‘허경영 사상 청년 연합(허청련)’이라는 거대한 청년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1985년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고대, 서강대생 약 20명으로 시작된 애국청년단은 2001년 허경영 총재를 인식하면서 허청련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카이스트 박사 82명을 포함한 100만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이 조직은 전국 대학과 각 지방으로 확장되었으며, 농어촌 봉사 활동을 전개하며 허경영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뛰는 봉사 단체였습니다. 회원 가입이 1년씩 지연될 정도로 엄격한 규율과 일사불란한 행동력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의 물량 공세와 회유가 시작되었고, 특히 새천년민주당은 허청련 회원들의 입당을 간곡히 호소하며 조직을 흡수하려 했습니다. 제가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출마를 포기하자, 허청련 내부에서는 파벌 싸움과 내분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저는 허청련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정치 활동과 현재의 하늘궁

저는 민중당 창당에도 개입하여 이재오, 제정구, 이우재, 장기표, 김부겸 등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 정치 개혁 1세대들입니다.

저는 대통령 선거에 세 번 출마했으며, 출마할 때마다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냈습니다. 언론에서는 저를 미친 사람으로 몰아갔지만, 저의 말은 항상 옳았습니다. 허청련의 카이스트 박사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성인들은 저를 ‘조국의 민족의 태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농어촌 봉사, 우산 봉사, 무료 급식 봉사 등 55년간 봉사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금은 하늘궁을 만들며 원래의 목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를 가볍게 보거나 누명을 씌우려는 사람들은 민사 손해배상까지 들어가 집까지 날아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마어마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제가 나타나면 대학생들이 졸도할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저의 이야기를 통해 신인을 올바르게 아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