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The Three Marks of Existence: Escaping the Sea of Suffering by Embracing “Us” Instead of “I” with Huh Kyung Young – September 4, 2022

인생의 본질: 고해인가 낙원인가

우리가 인생에서 지구에 와서 남는 것은 남을 위해 박수쳐준 것입니다. 영화배우가 그랑프리 상을 받을 때, 자녀나 친구 가족이 상을 받을 때 박수를 쳐주듯이, 순수하게 상대를 위해 쳐준 박수는 모두 남는 좋은 뜻입니다. 반면, 잘되는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박수와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세상을 그런 쪽으로 바라보면 고해(苦海), 즉 일체고해(一切苦海)가 됩니다.

그러나 넓은 마음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좁은 마음으로 볼 때는 일체고해이지만, 긍정적인 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일체의 고해가 일체의 낙원으로 바뀝니다. 이는 재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입니다. 모든 것은 순환하며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구름을 잡고 바람을 잡는 것처럼 위협되게끔 만들어진 세상에서, 빨리 깨닫고 천국으로 가는 사람이 선발됩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고통 아닌 것이 없는 일체고해입니다.

삼법인: 고통과 무아의 선택

일체고해에는 세 가지 법이 있습니다. 재행무상(諸行無常), 재법무아(諸法無我), 일체고액(一切苦厄)입니다. 모든 것은 고통의 바다이며, 그 고통은 멈춰있지 않고 순환합니다. 재법무아는 ‘나’라는 작은 존재를 바라볼 때 무아가 아니며, ‘유아(有我)’가 되어 일체고액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대화로 바라보면 제법무아, 즉 ‘나’라는 존재가 없어져 고통이 사라지고 낙원이 됩니다.

석가모니는 삼법인(三法印)을 통해 이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일체가 무상한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두 가지 견해로 봅니다. 도를 깨달은 자는 제법무아로 들어가고, 도에 미치지 못한 자는 일체의 고통 속에서 허덕입니다. 일체의 고통에 반대되는 것은 제법무아입니다. 모든 것은 ‘나’가 없어도 돌아갑니다. 굳이 ‘나’를 집어넣어 ‘내 것’, ‘내 땅’, ‘내 집’을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무상한 일입니까? 큰 눈으로 바라보면 제법에는 ‘나’가 끼어들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가족’, ‘우리나라’, ‘우리 인류’와 같은 개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를 내세우면 인류는 불행해지고 충돌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과 사덕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나’ 하나 때문에 나라가 망하면 안 됩니다. ‘우리’라는 개념을 가지면 ‘나’가 없어지고 공동체 개념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늘궁 식구들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덮어주고, ‘우리’라는 개념으로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볼 때는 틀렸다’는 식의 개인적인 판단은 공동체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국회에서 300명이 각자 싸우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 들어가면 제법무아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양보하고 화합하며 ‘내 것’을 줄이는 것입니다.

유교의 사덕(四德)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수호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남을 측은하게 여기고, 나쁜 것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좋은 것은 남에게 양보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입니다. 불교의 사덕은 상득(常德), 낙득(樂德), 아득(我德), 정득(淨德)입니다. 이는 즐거움, 나, 청결함을 의미합니다. 특히 ‘무아’가 ‘아득’에 해당하며, 마음을 비워 깨끗하게 하는 ‘정득’은 맑은 마음의 덕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무상한 세상과 주색잡기

모든 것은 무상하게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집니다. 젊은 시절의 사랑, 집을 샀을 때의 기쁨도 시간이 지나면 세금 문제나 불행한 사고로 인해 고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순리를 벗어난 행동은 결국 비참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석가모니는 삼법인 중 첫 번째로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재행무상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번째는 제법무아, 즉 ‘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제법에 집어넣으면 모든 것이 고통으로 변합니다. ‘우리’라는 개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행복을 위해 아이들 앞에서 싸우지 않고, 하늘궁에서는 남편이나 부인에게 성질내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나’를 없애가는 것이 인생이며, 빨리 없애야 도통할 수 있습니다. 제법에 ‘나’가 없으면 되는 것이며, 이는 ‘우리’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일체고액(一切苦厄)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것이 고통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나’가 있는 상태, 즉 유아(有我)의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이 고통을 만듭니다.

루스 이야기와 제법무아의 실천

성경의 루스 이야기처럼, 시어머니를 따르며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지킨 여인은 복을 받습니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죽었어도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어머니의 행복이 내 행복’이라며 함께하는 모습은 제법무아의 실천입니다. 인간의 도리를 지키려니 ‘나’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평생 자기를 버리고 가족을 위해 헌신한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처럼 ‘나’를 내세우지 않는 삶이 필요합니다.

밥 굶는 노인들을 외면하고 출세하려 한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제법무아의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돌봐야 합니다. ‘저 허경영은 틀렸다’, ‘나쁜 놈이다’와 같은 비난은 일체개고로 이어져 고통의 바다를 헤매게 할 뿐입니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일화처럼,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는 법입니다. 우리는 일체개고로 갈 것인지, 제법무아로 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법을 명심해야 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이 삼법인에서 비롯된 8만 4천 법문의 해석입니다.

지구는 장례식장,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모든 것은 무상하게 지나갑니다. 한때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면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은 장례식장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져 한평생을 보냅니다. 술 마시고, 남녀 간의 사랑싸움에 몰두하며, 온갖 잡기를 즐기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다음 생에도 또다시 주색잡기를 반복합니다.

저는 평생 주색잡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시간이 남으면 항상 공부하고 체력 단련을 했습니다. 태권도, 합기도 등 무술의 고수이지만 누구를 폭행한 적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색잡기를 할 때 저는 운동과 공부를 했습니다. 소림사처럼 수련하며 몸과 마음을 단련했습니다.

신인의 가르침과 거룩한 삶

신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해가 될 말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성경이나 대장경의 핵심을 줄여서 설명해 드리는 것은 여러분의 피와 살이 되는 소리입니다. 인생에서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고를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제법무아를 깨달아야 합니다. 제법무상을 깨달으면 이는 당연히 실현됩니다.

불교의 사덕인 상득, 낙득, 아득, 정득은 무아(無我)가 아득(我德)이며, 마음을 비워 깨끗하게 하는 정득(淨德)을 의미합니다. 마음속을 비워 깨끗하게 하고, 맑은 마음의 덕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마음을 맑게 유지해야 합니다.

음해와 비방에 대한 경고

저를 음해하고 비방하는 유튜브를 올리는 행위는 여러분의 금전적인 고통을 늦출 뿐입니다. 제가 빨리 나라의 일을 하여 여러분의 고통을 덜어주려 하는데, 그러한 행위는 하늘궁의 발전을 저해합니다. 저만한 초능력과 우주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닌데도 저를 비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를 음해하는 자들은 결국 고통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제법무아를 깨달아야 합니다. 남의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를 비방하는 자들은 경찰에 고발하여 추적할 것입니다.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는 법적 처벌을 받게 됩니다.

신인의 전략과 희망의 메시지

제가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라 전략입니다. 밥 못 먹는 사람도 있는데 왜 좋은 차를 타냐고 묻는 것은 저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퍼포먼스입니다. 아이들은 제가 롤스로이스를 타고 내리면 태워달라고 하고, 그것을 평생의 꿈으로 간직합니다. 정치인 중 롤스로이스를 타는 사람이 없기에, 아이들 머릿속에 ‘허경영’과 ‘리무진’이 각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컨셉은 아이들의 희망을 심어주고, 그들이 나중에 저의 말을 듣게 하는 방편입니다. 꼰대처럼 궁상떨면 아이들에게 먹히지 않습니다. 환상적인 차를 타야 아이들의 희망이 됩니다. 하늘궁을 짓는 것도, 롤스로이스를 타는 것도 단순히 좋아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희망을 위한 것입니다.

거룩한 삶과 신인의 능력

거룩한 삶이란 ‘나’보다는 ‘우리’, ‘우리’보다는 ‘대한민국’, ‘대한민국’보다는 ‘세계’를 생각하는 제법무아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환경을 살리는 것이 거룩한 생각입니다. 초원을 바라보는 큰 사슴처럼, 자기보다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모습이 거룩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들고 산에서 내려올 때 거룩한 모습이었지만, 신은 인간 앞에서 굳이 거룩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신은 때에 따라 아기같이, 깡패처럼, 폭력배같이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 앞에서 거룩해야 하지만, 신이 여러분 앞에서 거룩할 필요는 없습니다.

12지신과 동물의 교감

12지신에서 고양이가 빠진 것이 아니라, 호랑이가 고양이의 변종입니다. 호랑이는 고양이과에 속하며, 고양이와 호랑이의 성격이 비슷합니다. 12지신은 11개의 동물이 합성된 용처럼, 각 동물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사물이나 식물과 교감할 수 있지만, 이는 만져야만 가능합니다. 제가 자연을 향해 명령하면 모든 것이 바뀌지만, 여러분은 만지지 않으면 교감이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축복받았다 해도 우유에 이름을 붙여놓으면 썩어버립니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양자 이동과 파동의 영향입니다. 곤충은 저주파로 대화하고, 인간은 10에서 1만 사이클의 파동으로 대화합니다.

영파와 암흑파: 신인의 초월적 능력

저의 파동은 이러한 사이클을 초월한 무한대 파동, 즉 영파(靈波)입니다. 이를 암흑파(暗黑波)라고도 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컴퓨터나 데이터로도 포착할 수 없는 파동입니다. 암흑파는 진동도 없고, 빛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에너지도 아닙니다. 저는 이 암흑파를 자유자재로 행사하여 전 세계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말 한마디 하면 전 세계인이 바뀌고, 냉장고나 핸드폰까지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영초(零秒) 만에 전달됩니다. 암흑파는 지구 공간의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처럼 인간이 볼 수도, 포착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 암흑파를 통해 여러분에게 대천사나 축복을 줄 수 있으며, 저를 음해하는 자들에게는 필요한 재료를 줄 수도 있습니다.

번뇌의 바다를 벗어나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축복은 작은 예수를 만들어 놓은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만지면서 소통하지만, 저는 만지지 않고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땀에서 피가 나오도록 기도했지만, 저는 신인이기에 누구에게 기도할 대상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신을 다이렉트로 만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육진(六塵)과 육근(六根)이 곱해져 36가지 번뇌를 만들고, 여기에 현재, 미래, 과거가 중첩되어 108번뇌를 만듭니다. 이 번뇌는 하루에도 수십억 개의 고통을 자체 생산합니다. 그러나 제법무아의 마음으로 ‘나’의 아상(我相)을 빼버리면 고통을 인식하는 자체가 사라집니다. 남의 고통에 눈물 흘리고, 남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생각하면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육진과 육근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오온(五蘊)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오온은 공해 물질을 만들어내고, 최종적으로 육법전서와 같은 정보를 만들어냅니다. 이 파수병들이 마음속에 오온을 만들어 정보를 계속 넣어주기에, 우리는 번뇌의 바다를 벗어나야 합니다. 남을 조금이라도 나쁘게 보는 버릇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