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Huh Kyung-young’s Unveiling of Providence: Beyond Truth, Ethics, and Law, Embracing the Eternal Principle of Love – September 2, 2024

섭리의 본질과 우주 통제 원리

안녕하십니까, 신님. 오늘은 섭리에 대해 질문드리겠습니다. 신인께서는 신의 본체로서 섭리라는 체계를 만드셨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재 지구에 오셔서도 신인님의 뜻과 전능을 통해 실시간으로 섭리를 조정하고 수정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섭리의 근원과 신님과 섭리의 관계가 궁금하며, 순서적으로 섭리 위에 인간을 두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을 위해 섭리를 만드신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우주 전체를 통제하는 데는 섭리가 필요합니다. 인간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바로 우주 섭리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섭리에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섭리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섭리에는 하늘의 기와 땅의 기, 그리고 인간의 기, 즉 천지인(天地人) 세 가지 기운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통섭(統攝)의 섭(攝)입니다.

진리와 섭리의 근본적 차이

섭리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진리와는 다릅니다. 옛날 상투를 틀던 시대와 지금은 시간이 다릅니다. 지금 상투를 꽂고 있으면 정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묶여 있습니다. 섭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진리입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 진리가 이곳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다닙니다.

어릴 때의 행동은 용서받지만, 어른이 되어 아기 때의 행동을 하면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아기 때는 아기의 진리가 있고, 어른이 되어서는 어른의 진리가 있습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만, 섭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만, 우리의 숙명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부모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나의 부모입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혹은 북한에 갔다고 해서 부모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은 진리와 섭리의 차이점을 모릅니다. 제가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확실히 아시겠습니까?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공간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북한의 법은 남한과 다를 수 있고, 중국의 관세법은 우리와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이 진리입니다.

윤리와 법리, 그리고 섭리의 위계

진리 밑에는 윤리가 있습니다. 윤리도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습니다. 법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원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 다릅니다. 지방법원에서는 무죄인데 고등법원에서는 유죄가 되기도 하고, 지방법원에서 유죄인데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되기도 합니다. 법리 해석이 다릅니다. 윤리와 법리는 진리만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재합니다. 윤리는 윤리대로, 진리는 진리대로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혼동합니다.

윤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재를 받습니다. 법리도 시간과 공간에 제재를 받습니다. 옛날의 법이 지금 제대로 적용받을 수 없습니다. 법리도 바뀌고 역사와 시대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진리와 윤리, 법리는 역사와 시대 흐름에 따라 모두 바뀝니다. 그러나 섭리는 역사나 시대 흐름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고, 인간은 영원한 종입니다. 예수는 몇억 년이 지나도 예수입니다. 섭리는 바뀌지 않습니다. 섭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재를 받지 않는 진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섭리의 실천: 사랑과 통섭

어머니가 자식을 낳으면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것, 그것은 하늘이 준 섭리입니다. 이 섭리를 어기면 진리를 모르게 되고, 진리를 모르면 윤리를 모르게 되며, 윤리를 모르니 법리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는 것을 통섭(統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통섭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통일장 이론 강의도 저밖에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물으면 이런 개념이 없습니다. 진리, 윤리, 법리, 섭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야기할 사람이 없습니다.

역사와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하는 윤리, 진리, 법리는 섭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을 사랑해라”는 진리입니까, 섭리입니까? 섭리입니다. 섭리가 무서운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라는 것은 신이 명령한 것이므로 섭리입니다. 법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진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대학생이 고등학생 선생을 때려 이빨이 부러졌다고 가정해 봅시다. 담임선생이 윤리와 법리로 따지면 학생은 감옥에 가야 합니다. 진리로 따져도 감옥에 가야 합니다. 누가 봐도 “그 자식을 혼내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신부에게 가서 “이것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으면 “감옥에 넣는 것은 곤란합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곤란합니까? 섭리에 가까운 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있습니까? 그 아이가 어떻게 성장했습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아이가 어릴 때 엄마가 마부리를 했습니까? 아이를 맨날 학원에 보내고 마부리하고 이랬다는 말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컸습니까? 맨날 열쇠 가지고 학원 갔다 오고 집에 가면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고 혼자 외롭게 컸다는 말입니다. 부모는 있지만 실제로는 부모가 잘 되어 있는 집인데, 아이는 집에 가면 학원 가라고 하고, 엄마는 직장 가버리고, 아버지는 직장 가버리고, 학원 갔다 오면 아무도 없습니다. 엄마 아빠가 아이를 데려오고 갖다 주는 것을 물건처럼, 보관용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가 어떻게 컸겠습니까? 분노 조절 장애가 된 것입니다. 짜증이 나는 것이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의 50%가 분노 조절 장애입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전체 인구의 10%가 분노 조절 장애인 나라는 세계에서 없습니다. 급격히 경제가 꼴찌에서 10등으로 올라가면서 이런 사태가 온 것입니다. 쫓기는 사태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상하게 삐딱해졌습니다. 그냥 주먹이 먼저 나가고,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냅니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농사지을 때 보면 느렸습니다. 그 느린 속도를 시골에서 편안하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박정희 대통령 이후에는 조급해졌습니다. 경제 개발을 하고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인성이 해쳐진 것입니다.

섭리의 관점에서 본 책임과 용서

이 아이를 지금 법원에 판사에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감옥에 보내야 하겠습니까? 신부나 목사, 혹은 우리 같은 신인이 바라볼 때는 맞은 사람이 잘못입니다. 교육을 잘못 시킨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부모와 선생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로봇이 주인을 때리면 누구 잘못입니까? 주인 잘못입니다. 우리가 로봇 AI를 잘못 집어넣은 것입니다. 입력을 잘 시켜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람을 AI 감옥에 넣어야 하겠습니까? 불량품이 나온 것입니다. 불량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불량품을 만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불량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윤리나 법리로 하면 또 범죄자가 나옵니다.

그 선생이 이빨 치료비도 달라고 하지 않고 “내가 미안하다. 내가 너에게 교육을 잘못 시켰다. 네가 부모님께 사랑을 못 받은 것을 알았으면 내가 너를 잘해줄 걸. 내가 너에게 꾸짖음을 함부로 하니 짜증이 나지? 내가 네 사정을 잘 몰랐다. 나를 용서해다오”라고 말하면 윤리나 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 아이를 용서해 준 선생이 몇십 년 있다가 어디 가서 만났는데, “선생님, 잘 모르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누구냐, 네가?”라고 묻자, “선생님, 옛날 이빨 부러뜨린 학생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딱 보니 이 사람이 사회적으로 성공해 있습니다. “아, 그때 선생님이 저를 감옥에 넣었으면 저는 지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선생을 붙들고 울고 고마워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윤리나 법리가 진리를 못 따르고, 진리는 섭리를 못 따르는 것입니다. 섭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잘못하는 것은 어른들을 본받아서 그렇습니다.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너무 윤리나 법리를 따지면 아이들이 숨 막혀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아, 잘한다, 예쁘다”라고 말하며 좋게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안티들이 저에게 욕을 해도 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섭리로 가야 하는 길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늘의 뜻은 무조건 사랑입니다. 윤리니 법리니 진리니 하는 것으로 따지지 마십시오. 모든 책임은 자기에게로 돌리고, 남은 없다고 생각하십시오. 모든 원인은 내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섭리입니다.

교육의 실패와 섭리의 지혜

아이들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지도 않습니다. 교육자들이 그렇습니다. 교육이 실패하는 것이고, 나라가 잘못되는 것입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섭리와 진리와 윤리와 법리를 통섭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지입니다. 맨날 윤리 따지고, “너 왜 그렇게 하냐? 너 왜 법을 어겼냐? 너 왜 진리를 어긋나는 행동을 하냐?” 이러면 되겠습니까? 남 탓을 돌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도 남 탓 안 돌리면 성공하고, 남한에서도 남 탓 안 돌리면 성공합니다. 진리가 어떻고 하는 것과 관계없습니다. 그 사람은 어느 나라를 가도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섭리를 따지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진리니 윤리니 법리니 아무리 지켜봐도 세상은 계속 나빠집니다. 통섭을 해야 합니다. 전체를 꿰뚫어야 합니다.

만약 법원의 판사가 법리로 재판을 하지 않으면 목이 달아납니다. 섭리를 할 수가 없습니다. 힘들지만 최대한 법리는 섭리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너 선생 이빨 부러뜨렸지? 반성하고 있나?”라고 물을 것입니다. 판사가 “무엇을 반성합니까?”라고 물으면 참고해 줘야 합니다. 섭리를 개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법리적으로 폭행죄로 징역 얼마라고 하면 아이를 진짜 망쳐버립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굉장히 무서운 것입니다. 이런 섭리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율법과 섭리: 예수의 가르침

과거 예수로 계실 때도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사랑으로 가다가 율법에 대항하셨습니다. 율법은 법리와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신이 만들어 놓았으니 섭리인 줄 알지만, 섭리가 아닙니다. 종교 교리이자 법입니다. 법 위의 법이 율법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숨 막힙니다. 율법은 일요일 날 응급 환자가 있어도 건드리면 안 됩니다. 그것이 유대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느냐?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일요일이니까 율법에 환자를 만지면 안 되고, 차를 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율법이 사람을 잡는 율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가 율법에 정면으로 대항하다 죽은 것입니다. 율법에는 섭리가 녹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자동차를 잡는데 자동차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되겠습니까? 내가 필요할 때 쓰고 집어넣어야지, 자동차를 방에 가서 같이 자야 합니까? 율법의 노예가 되어 꼼짝을 못 하는 것입니다. 자동차 하나 사놓고 자동차의 노예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섭리의 지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보면 인간이 가져야 할 여섯 가지 마음 자세가 있습니다. 첫째 치궁(治躬), 둘째 청심(淸心), 셋째 제가(齊家), 넷째 병객(屛客), 다섯째 전용(錢用), 마지막 여섯째 낙시(樂施)입니다.

  • 치궁(治躬): 올바른 몸가짐. 자기 몸을 훈계하는 것입니다.
  • 청심(淸心): 올바른 마음가짐.
  • 제가(齊家): 올바른 가정생활.
  • 병객(屛客): 올바른 손님 대접. 뇌물을 받으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 전용(錢用): 올바른 물질 사용. 물자를 아껴 쓰고 자원 낭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 낙시(樂施): 올바른 베풂. 남에게 좋은 것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당시에는 유교 개념이 들어 있는 것이지만, 이것을 올바로 하려면 법을 들이면 안 되고, 윤리를 들이면 안 됩니다. 섭리를 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최고이고 지선(至善)입니다. 제일 올바른 것이지 중간 지도는 안 됩니다.

정약용의 목민 육서나 경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8조목도 모두 진리가 아니라 섭리에 가깝습니다. 우리 조선 시대에는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물질을 가지는 데도 도가 있고, 지식을 쌓는 데도 도가 있고, 마음을 닦는 데도 도가 있고, 몸을 닦는 데도 도가 있고, 집을 다스리는 데도 도가 있습니다. 이 여덟 가지에 모두 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는 진리보다는 섭리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전부 섭리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전부 진리다, 윤리다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윤리가 아니라 도리(道理)입니다.

섭리, 천리, 도리, 진리, 윤리, 합리, 법리의 위계

도리라는 것은 우리가 사람 사는 도리입니다. 도리는 윤리보다 높습니다. 도(道) 자가 붙었기 때문입니다. 도사들이 행하는 이치입니다. 사람의 도리는 윤리나 법리보다 높습니다. 그래서 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리도리 짝짜꿍이라는 말도 이 도리를 말합니다. 하늘과 땅이 붙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이렇게 도리도리 짝 해야 우리가 번성하는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 도리도리가 진리니 합리니 하는 것보다 섭리에 가깝습니다.

섭리가 가장 위에 있고, 그 밑에 천리(天理)가 있습니다. 섭리가 천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밑에 도리가 있고, 진리가 있으며, 윤리가 있고, 합리가 있으며, 법리가 가장 낮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섭리, 천리, 도리, 진리, 윤리, 합리, 법리 일곱 단계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진리가 있는 위치는 별로 높지 않습니다. 중간쯤에 있습니다. 진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윤리, 합리, 법리도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도리와 섭리는 관계가 없습니다. 지금 제가 강의해 드린 이런 것이 전부 도리입니다.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차원이 높은 것입니다.

목민 육서도 도리입니다. 인간이라면 이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도 모르는 사람이, 지혜도 쌓지 않은 사람이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등병이 병장에게 “야, 이 새끼야”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인간의 도리가 아닙니다. 진리보다 법보다 인간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섭리, 그 밑에 천리, 도리, 진리, 윤리, 합리, 법리 순서입니다. 윤리와 법리 사이에 합리가 있습니다. 나보다 나이 많은 동생이 있을 수 있고, 나이 많은 삼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윤리를 따라야 합니까? 꼬마가 어른 보고 삼촌, 삼촌 이러면 보기 좋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때는 합리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이를 좀 플러스해서 말을 다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 살짜리 보고 “아이, 삼촌”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합리적으로 변형을 시키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