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생존을 넘어 공존공영으로
자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창을 들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창을 들어야 하지만, 과하면 남을 해치고, 반대로 창을 내려놓으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착취당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과 자신을 잃게 되는 상황이 자주 충돌합니다.
자아는 자기 생존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자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자아 실현은 ‘공전공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공적인 것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개인주의적인 자아를 공적인 영역에 두어야 공존공영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자는 망하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적자생존의 원리가 존재하지만, 인간은 공전공영을 벗어나면 진정한 자아 실현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공전공영을 벗어나는 것은 이기주의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자아 실현: 자리이타를 넘어 이타자리로
자아 실현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의미합니다. 내가 남의 이익을 위해 살아주는 것이 진정한 자아 실현입니다. 이는 철학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리이타가 되면 자아 실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리’ 앞에 ‘자(自)’가 오면 안 됩니다. ‘이타(利他)’, 즉 남을 위해 희생하고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진정한 ‘자리(自利)’입니다.
이것을 방정식으로 풀면, ‘이타’가 먼저입니다. 남을 먼저 도우면 자연스럽게 나에게 이익이 돌아옵니다. “내가 좀 도와주면 월급을 얼마 주겠습니까?”와 같은 생각은 자리이타가 아닙니다. 자기 살기 위해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이타를 먼저 해야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아 실현의 방법이자 적자생존의 방법입니다. 같은 말 같지만 다릅니다.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남을 돕는 것입니다. 자기를 돕기 위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돕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살게 됩니다. 같은 말이지만 반대가 되는 이 중요한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영생을 향한 다섯 가지 지혜: 원행지, 현전지, 부동지, 선의지, 이타자리
우리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는 ‘현전지(現前智)’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멀리 바라보고 사는 ‘원행지(遠行智)’가 필요합니다. 가까운 곳만 보면 적자생존에 머물지만, 멀리 보면 천국과 지옥, 죽음 이후까지 생각하게 되며 자아가 실현됩니다.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멀리 보는 자는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바른 길에는 흔들림 없는 ‘부동지(不動智)’가 있어야 합니다. 자아 실현된 자들은 이타의 중심에 확고히 서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가치를 하늘에 두기 때문에, 주색과 같은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부동지를 가진 자가 자아 실현된 자입니다.
또한, 자비를 베푸는 ‘선해지(善解智)’를 가져야 합니다.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자아 실현의 길입니다. 적자생존만이 전부가 아니라 공존공영이 있어야 합니다. 현전지, 원행지, 부동지, 선해지, 그리고 이타자리가 바로 공존공영을 이루는 요소들입니다.
적자생존을 넘어 적자영생으로
적자생존은 생존의 방법이지만,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적자영생’입니다. 영원한 하늘에서 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당장의 생존이 급하다고 해서 영생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영생을 보는 자는 세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압니다. 좋은 자동차를 사도 영원히 가지 않습니다. 멀리 보는 자는 당장의 물질적 욕심에 매달리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더 큰 가치를 추구합니다. 심지어 장인이 좋은 차를 사주려 해도 거절하며, 그 돈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권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멀리 보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영생을 보는 자는 이타자리를 실천합니다. 장인이 주는 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장인에게 감사하며 대접하려 합니다. 이러한 사위를 보면 장인은 안심하고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사법고시 수석 합격이라는 스펙보다, 이러한 인품이 진정한 자아 실현의 증거입니다.
이타자리의 깊은 의미: 내 것이 아닌 것을 돌려주는 행위
자리이타를 부르짖는 자들은 위선자일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아 실현은 ‘이타자리’입니다. 남을 먼저 이롭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내가 잠시 가지고 있다가 돌려주는 행위입니다.
무료 급식을 예로 들어봅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무료 급식을 ‘자리이타’라고 생각하지만, 더 높은 단계에서는 ‘이타자리’입니다. 멀리 보면, 무료 급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밥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뿐입니다. 그 밥은 내 것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의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의 주인이며, 나는 그저 주인에게 밥을 돌려주는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음식은 배고픈 자들의 것입니다. 배부른 자가 먹으면 당뇨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음식은 배고픈 자들의 것이며, 이를 봉사나 무료 급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무료 급식을 하는 사람은 “이것은 그 사람들 것을 그 사람들이 가져가는 것이지, 내 돈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를 모시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부모뿐만 아니라 남의 부모도 모셔야 합니다. 어른들을 모시는 행위는 내가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밥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자신의 복을 가지고 태어나 밥을 먹는 것이지, 엄마가 먹여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는 그저 심부름만 할 뿐입니다.
이처럼 사물을 보는 방법이 달라야 영원히 보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아 실현은 대단히 무서운 말이며, 차원이 높은 것이 아니라 기본이 되어야 할 태도입니다.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것은 그 사람들 것이고, 내가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 지도층이 움켜쥐고 있는 것을 돌려주는 것이 이타자리입니다.
혁명의 본질: 마음의 변화와 영생의 추구
‘혁명’은 단순히 제도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뒤집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리이타가 이타자리가 되는 것이 혁명이며, 생존이 영생으로 바뀌는 것이 혁명입니다. 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생각해야지, 100년만 잘 살다가 망하는 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영원히 지속되게 하는 것이 혁명입니다.
내가 말하는 영원히 보는 것, 즉 영생을 추구하는 ‘원행지’의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마음의 혁명이 일어나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납니다.
미래 사회와 자아 실현
미래 사회에는 의식주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아 실현’에 쓸 것입니다. 봉사자가 많이 나오고, 기부자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져, 지금까지는 눈앞의 현실만 보았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까지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갔다 온 사람과 중간에 내려온 사람의 차이는 만족감에 있습니다.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사람은 성취감과 희열을 느끼며, 올라오는 고통을 잊게 됩니다. 마치 아이를 낳은 여성이 산통을 잊고 아이의 기쁨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산을 정복한 사람은 다음에 또 산에 오르려 합니다. 고통을 잊게 하는 희열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학업이든 무엇이든 중도 포기하는 자는 이러한 성공의 맛을 볼 수 없습니다. 항상 고통의 연속일 뿐입니다. 따라서 항상 이상과 목표는 멀리, 높은 곳에 두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면 그동안의 고생은 싹 사라지지만, 재수하고 떨어지면 고통만 남습니다.
영생의 세계를 지켜보며 희열을 느낀 자는 세상의 어떤 행복도 우습게 보입니다. 희로애락에 빠지지 않고, 진정한 기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멀리 본 사람은 고통을 잊고 기쁨을 기억하며 나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 실현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