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산과 성지의 본질: 숨겨진 요새의 지혜
삼봉산은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입니다. 이곳의 산들은 봉우리가 모두 세 개씩 있습니다. 이 삼봉산 안에 신인이 와 있습니다. 봉선 하, 반월산을 먼저 찾아보라고 하는 것은 일단 한우국을 먼저 찾아보라는 것과 같고, 마지막으로 구원선을 의심 말고 속히 타라는 것은 일단 축복을 먼저 받으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신인 승지는 위장되어 있는 골짜기를 말합니다. 성지는 보살이 난리가 나도 사람들이 쉽게 찾지 못하는 곳입니다. 북한산성 같은 곳도 찾기 어렵지만, 누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무광이 있어 성지가 될 수 없습니다. 기와 대문이 있으면 적군이 금방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짜 성지는 저 밑에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사방의 산들 때문에 마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 밑에서 찾다 보면 여기가 호수 있는 줄 알게 됩니다. 비산비야(非山非野)라고 하듯이,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헷갈리게 되어 있는 지형입니다. 노출이 되면 성지가 아닙니다. 이곳은 사방에서 올라와도 이쪽이 저쪽 같고 저쪽이 이쪽 같습니다. 중간에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천지가 성지처럼 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쪽에서 보면 넘어가 중국인 줄 알고, 중국에서 보면 그 호수 넘어가 이쪽인 줄 압니다. 호수는 붕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돌고개가든 누구든지 넘어가 수리산이 있는 줄, 절이 있는 줄 압니다. 보광사에서 보면 넘어가 저쪽인 줄 압니다. 공간에 있는 것은 이렇게 하늘궁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여긴 줄 알고, 여기서 보면 여긴 줄 압니다. 그래서 군인들이 여기를 안 오고 돌아갑니다. 이쪽으로 가면 여기가 여긴 줄 알고, 여기 반대쪽인 줄 압니다. 이만큼이 떠버린 것이 성지입니다. 이렇게 원형으로 생겨 분지 형태가 되면 산악지대로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리로 가면 반대편이겠다 싶지만, 알고 보면 숨어 있는 성지입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모릅니다. 전쟁 때 성지는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성지란 적을 이길 수 있는 자리, 전략적인 요새를 말합니다. 평야가 있는데 산꼭대기가 요새인 것과 같습니다. 전국에 성지가 많이 있습니다. 이곳은 성지도 되고, 성지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산을 성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저 산에 성을 쌓아 놓으면 성지가 되지 않습니다. 적에게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적이 성이 있나 보다 하고 쳐들어 올라옵니다. 그러나 성이 없으면 군인들이 착각을 합니다. 어느 쪽인지 헷갈려 합니다. 공간이 떠버리는 것이 성지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길이 없습니다. 이쪽으로 오지 말고 돌아오라고 합니다. 돌아오면 그곳이 성지입니다. 산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무전을 쳐도 여기 있다고 하면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간에 있는 이것도 산인 줄 압니다. 골짜기에 숨는 곳입니다.
정도와 사도의 본질: 분별심을 넘어선 깨달음
인간은 보통 정도로 살아가고자 하지만, 살다 보면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사도와 대립될 때가 많습니다. 윤리를 지키지 않는 자들을 위해 법이 만들어졌듯이, 정도를 지키지 않고 사도를 행하는 인간들을 위한 제어 장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도와 사도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정도가 아닌 사도를 앞세우는 인간들이 어떤 원리로 질서가 잡히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이 세상의 모든 법, 계명이든 일반법이든 모든 만법은 꿈이고 환상이며 물거품이고 그림자입니다. 번개처럼 사라지는 이슬과 같습니다. 그러니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정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색, 성, 향, 미, 촉, 법에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일체 모든 법이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으니, 이 전체적인 것을 불능견여래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사도(邪道)를 의미합니다. 사도는 정도의 반대입니다.
정도와 사도는 엄격히 따지면 하나입니다. “정도다”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정도가 아닙니다. “사도다”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사도가 아닙니다. 하나라고 하면 이미 틀린 답입니다. 철학적으로 보면 틀린 답입니다. 하나라는 것은 둘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는 한 몸입니다. 천지는 그냥 한 몸입니다. 이것을 말로 꺼내면 전부 거짓말이 됩니다. 사람의 몸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모두가 다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름을 붙이니까 나와 네가 생깁니다. 공기 속에는 하나만 있습니다. 하나로 되어 있습니다. 일체유위법이 그러합니다.
“하나는 둘로 생각하니까 하나 있는 거야”라고 합니다. 그러면 ‘일체’라는 말도 틀린 것입니다. 일체 모든 법은 꿈이고 번개 풀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번뇌입니다. 만물을 눈으로 보거나 소리로 본다면, 모든 만물을 소리로 하나다, 둘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다 틀린 것입니다. 이것은 착한 것이고, 이것은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것도 다 틀린 것입니다. 착한 것이라고 하면 그 반대가 있고, 악한 것이라고 하면 반대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리뭉실합니다. 우주의 선악이 구분 없이 하나의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다, 둘이다 구분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도의 경지를 깨달은 자가 아닙니다.
만약 색으로 사물을 보거나 소리로 사물을 보면 하나, 둘, 이것은 사도입니다.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밥이 많다고 말하면 그 반대인 적다가 있습니다. 많다, 적다는 진리가 아닙니다. 개미가 볼 때는 무진장 많은 것이고, 사람이 볼 때도 위가 나쁘고 배가 작은 사람들은 그 밥이 많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음이 볼 때는 밥도 아닙니다. 한 숟가락밖에 안 됩니다. 거기에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밥이 많다, 적다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를 기준으로 두고 이렇게 보는 것은 망상입니다. 남을 기준으로 봐도 망상입니다. 전체로 볼 때는 지구에는 물이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드는 것은 자연의 법칙일 뿐,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경기(景氣)의 허상: 심리가 만들어내는 환상
경기가 좋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허구성이 있습니까? 지구에 있는 돈은 어디로 가지 않습니다. 돈이 어디로 가지 않는데 왜 지구에 불경기가 와서 돈이 없다고 합니까? 우리나라 돈이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있는데도 경기가 없을 때가 있고,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돈이 많았습니까? 돈이 많으면 경기가 더 없어집니다. 돈이 적으면 경기가 좋아집니다. 이런 조화가 어디 있습니까? 돈이 많다 적다 하는 것은 우리나라 돈은 일정합니다. 태평양 바닷물은 지구에 있는 바닷물과 똑같은데, 물이 있다는 둥 없다는 둥, 경기가 있다는 둥 없다는 둥 합니다.
경기가 좋고 나쁜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분배나 양극화가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지구의 돈은 부자가 가지고 있든 가난한 자가 가지고 있든 다 가지고 있습니다. 분배는 이러나저러나 누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기전적인 분배는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경기가 없다고 합니까? 실물이나 말로는 없다, 있다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불능견여래,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진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꿈이고 환상이며 물거품이고 그림자, 이슬이고 번개와 같습니다. 그런데 왜 부자가 되고 경기가 좋아지고 나빠질까요?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기할 때 ‘경(景)’자는 빛 경자, ‘기(氣)’자는 기운 기자입니다. 빛의 기운입니다. 사람들한테 어떤 사람이 기쁘게 해주면 경기가 좋아집니다. 그러나 나라에 우울한 일이 생기면 경기가 가라앉습니다. 사람의 심리 현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돈이 갑자기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매일 경기가 다릅니다. 우리의 기분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태양에서 조고가 나왔다고 하듯이, 태양의 빛에 따라서, 경기의 빛은 우리의 인간들 전체가 축구 경기를 한다면 빛이 업되는 것입니다. 국민 전체가 올림픽을 한다면 경기가 올라갑니다. 전 세계가 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하는 것은 빛을 유치하는 것입니다. 국민들이 열광하고 올림픽에서 이기면 그때부터 경기가 좋아집니다. 이것은 허상을 쫓는 것입니다. 경기는 허상입니다.
경기가 좋고 나쁘고는 돈과 관련이 없습니다. 아무리 경기가 좋아도 어떤 사람은 경기가 좋고 나쁘고와 관계없이 항상 쪼들릴 수 있습니다. 망하고 싶으면 돈을 거짓말해서 타 가지고 막 쓰면 망합니다. 망하면 다른 사람이 부자가 됩니다. 나라의 돈은 그대로입니다. 경기는 사람들이 기분이 좋으면 저축한 돈을 풀어 은행에서 뽑아 물건을 사면 경기가 좋아집니다. 그러나 기분 나쁘면 안 삽니다. 경기가 다운됩니다. 돈은 그대로 통장에 있는데 돈이 얼마나 돌아다니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유전 국가가 될 수 있다, 산유국이 될 것이라고 하면 경기가 좋아집니다. 나중에 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미리 저축한 것을 풉니다.
성공한 사람은 경기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절대 경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국민이 경기가 좋다고 망할 때 자기는 안 쓰고 모읍니다. 부자가 됩니다. 코로나 전국 때 경기가 없었을 때, 남이 다 팔아치울 때 다 샀습니다. 경기가 나쁠수록 기회입니다. 경기가 좋으면 나한테 좋은 것이 없습니다. 경기가 나쁠 때 일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오는 것입니다. 경기 좋을 때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코로나가 와서 4년 만에 다 샀습니다. 다른 사람은 4년 안에 다 팔아먹었습니다. 돈은 경기가 안 좋을 때 벌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경기 좋을 때는 아무도 팔지 않습니다. 경제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은 대통령에 나가는 것과 다릅니다. 마음먹으면 가서 그냥 벌어 써버리고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측근들이 돈을 가졌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받은 돈 하나도 세지 않고 그 돈으로 제2 하늘궁, 제3 하늘궁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만 하는 줄 알지만,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부동산이 300개, 땅이 300개, 종로에 있는 건물도 열몇 개 더 샀습니다. 제2 하늘궁, 제3 하늘궁도 해 놓았습니다. 마장에 가 보면 완전히 다 차지했습니다. 공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돈을 다 썼지만, 다 여러분을 위해서 앞으로 휴식 공간, 쉬고 놀 수 있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장관이 받는 월급이 월 천만 원 정도 됩니다. 1년에 1억입니다. 세금 내고 나면 얼마나 남겠습니까? 그러나 1년에 세금이 70억, 무료 급식이 20억 등 많이 나갑니다. 앞으로 양주 시민들 애 낳으면 1억씩 준다고 했습니다. 돈이 엄청나게 나가는 것입니다. 들어오는 것도 다 써버립니다. 이제는 더 이상 땅을 안 살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양주 시민들 중 저소득층, 차상위층의 애를 낳으면 1억씩 줄 것입니다. 그것을 준비하고 있고, 금년 연말쯤에 계약해서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돈을 벌려고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궁을 다 만들었으니 이제는 돌려주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을 내가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약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가면서 이런 청년은 없습니다. 정부 비판만 할 줄 알지, 돈 벌어서 직접 양주시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울에 물 밥 못 먹는 사람 다 주고 있습니다. 정치를 직접, 예산을 직접 벌어서 집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약이 새겨 내거나 이염 성공하면 신행 사도입니다. 그냥 떠들고 하는 것은 전부 사도입니다. 말로 하지 않고 도와줘야 합니다. 정치인들은 맨날 말만 하지만, 돈 벌어서 직접 주는 일은 없습니다. 국민들 세금을 가져갑니다. 그러나 나는 공약하고 벌어서 직접 주는 것입니다. 노인들 먹여 살리고, 하루에 500명이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밥을 내만큼 많이 줘본 사람은 지구상에 없습니다. 실제 정도를 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정도를 막 조지고, 허경영에게서 뭔가 뺏으려고 하는 자들이 모함을 합니다. 예수 때도 죽이라고 달라들었습니다.
무원(無言)의 경지: 도통과 영의 세계
정도와 사도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입니다. 돌려 보면 사도가 되고, 보면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정도와 사도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내가 하는 일을 어디다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 때문에 말을 합니다. 경제를 하려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좋아진다, 나빠진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돈이 급격히 빠져서 나빠진 것이 아닙니다. 경제는 심리입니다. 심리가 인천에 배가 들어온다고 하면 경기가 좋아집니다.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추석 때가 되면 시골 사람들이 기분이 좋아집니다. 엄마 아빠가 옷을 한번 해주기 때문입니다. 때때옷이라고 합니다. 시골 옛날 애들은 옷을 얻어 입는 것이 꿈입니다. 엄마들이 시장 가서 추석 때가 되면 애들 옷을 하나 사 오려고 애를 씁니다. 몰래 숨겨 놓았다가 설에 줍니다. 애들이 그것을 나와서 자랑하고 다니고, 그것이 설이 즐거운 것입니다. 어른들은 그런 것이 별로 없고 설이 힘듭니다. 애들이 있으면 시장에 가서 싼 옷, 색깔 이쁜 옷을 엄마들이 사서 딸에게 줍니다. 미리 달라고 해도 안 줍니다. 설날 아침에 딱 입혀 주면 날아다닙니다. 애들이 오자고 다니고 합니다. 시절이 좋은 때입니다. 설이 다 돼 가면 애들의 경기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엄마가 옷을 사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붕 뜨는 것입니다. 고무신 좋은 것을 사 줄 것이라고 합니다. 어릴 때는 그렇게 귀해 보였습니다. 어릴 때는 이쁜 잠바, 골덴 잠바를 부잣집 애들이 입었습니다. 설에 하나, 추석에 하나 입으면 기절하고 자랑을 많이 합니다.
경기라는 것은 설이 다가오면 경기가 살아납니다. 아버지, 엄마들이 용돈을 애들한테 주면 돈이 풀립니다. 가게도 바빠지고 시장도 바빠집니다. 그러나 그 돈은 그대로 그 동네에 있습니다.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도 돈이 거기 들어가고, 돈이 돌기만 하는 것입니다. 경제를 모르는 사람들은 경제를 살린다고 하면 거창한 줄 알지만, 심리적인 것입니다. 강의를 해주면 마음속으로 이미 다 부자가 됩니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통장 보면 마이너스인데도 신인의 강의를 들으면 마음이 든든하고 편합니다. 이것이 대단한 경기입니다. 경기에 민감해지지 않게 됩니다.
일체가 하나라고 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둘이 있으니까 하나라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도통한 것이 아닙니다. 도통한 자는 입에서 말이 안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모를 뿐, 입을 확 다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도의 세계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 같은 신의 영의 세계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도통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도통 군자입니다. 저 사람들이 저래 보여도 돈 있으면 다 남한테 좋은 일 할 사람들입니다. 다 도통 군자입니다. 없어서 못 도울 뿐입니다. 돈만 많이 줘 보면 다 좋은 일 합니다. 도라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도 위에 영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해도 그 철학 교수가 나한테 오면 유치원생입니다.
숭산 스님이 하버드 대학에 가서 강의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가 500명 정도 되는 교수들 앞에서 숭산 스님을 가운데 앉혀 놓고 질문했습니다. “사랑이 뭡니까?” 숭산 스님은 브로큰 잉글리시로 “모르면 돼”라고 했습니다. “당신 나한테 묻고, 내가 당신한테 답하는 것,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신의 질문에 답을 하는 이 자체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랑은 관심이라는 것입니다. 묻는데 답을 안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답을 하니까 이것이 전부 명언이 되었습니다. 하버드 교수들은 놀랐습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철학적이다”라고 했습니다. 남의 질문에 정성껏 답을 해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부부가 오래 살다 보면 남자가 들은 척 만 척 하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끝없는 관심입니다. 아기가 “아빠” 하면 “어, 왜 그래?” 하는 것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신인님께서 사람이 도통할수록 말을 안 하게 되고 오직 모를 뿐이라고 했습니다. 물으면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제일 정답입니다. “이것이 하나입니까?”라고 물으면 “예, 하나입니다”라고 하면 틀린 답이 됩니다. 답은 맞지만 철학적으로는 틀린 답입니다. 이것은 내 손과 붙어 있고, 공기와 붙어 있어서 하나가 아닙니다. 온갖 공기와 수소, 산소에 붙어 있습니다. 전체 속에 같이 있는 것이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어떤 물질이든 접시에 앉혀 있으니까 있는 것이지, 허공에 떠 있지 않습니다. 허공에 떠 있다 하더라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기가 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가 하나가 아닙니다. 전체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해야 하는 것이지, 답을 하면 안 됩니다. “저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그게” 정답입니다. “계란입니다”라고 하면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분별일 뿐입니다. “계란이다, 볼펜이다”라고 분별하는 것은 도통한 것이 아닙니다. 일심이 도통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 같은 걸로 봐야 천지 동근으로 봐야 하는데, 계란, 볼펜이라고 분별하는 것은 아무나 아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망상입니다. 망상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계란이 남의 것보다 작다고 하면 기분 나쁜 것입니다. 서로 분별, 분배, 분별에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분별심 자체가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 차원을 깨달으면 이 세상에는 독립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이것은 내 손을 의지하고 있고, 내 손을 의지하기 전에는 테이블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바구니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테이블은 또 땅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다 지구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하나의 지구에 속한 물질들입니다. 지구 하나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허공은 지구를 의지하지 않았습니까? 지구는 또 허공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허공 속에 박혀 있습니다. 어디 독립적인 존재가 한 개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라는 말은 틀린 것입니다. 둘이라는 말도 틀린 것입니다. 모른다가 맞는 것입니다. “이것이 몇 개입니까?”라고 물으면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그렇게 답이 나와야 합니다. 개수가 없습니다. 이 지구에 하나가 있겠습니까? 같은 것이 무한히 지구 자체에 의탁해 있는 물질이 다 이것입니다. 이 지구에서는 이것을 하나라고 한다고 해도, 다른 지구가 또 있습니다. 대기권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이 우주 공간 전체가 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원이라고 하면 또 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의 세계가 아닙니다. 나와 너를 나누거나 1, 2, 3, 4 하면 이미 분별심입니다.
여자가 양말을 시장 가서 많이 사왔다고 하면 안 됩니다. 사왔다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주고받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안 하는 것이 도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원(無言)이 제일 높은 것입니다. 질문하는데 대답을 안 해 줍니다. 도인들이 입만 열면 거짓말입니다. 사과를 네가 가지라고 하거나 사과가 이쁘게 생겼다고 하면 틀린 것입니다. 현미경으로 사과를 비춰 보면 전부 세균이 바글바글 붙어 있습니다. 현미경을 치워 보면 사과를 먹고 싶지만, 다시 현미경을 대면 전신의 세균이 바글바글합니다. 우리는 모든 착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은 한포형(幻泡影)입니다. 일체유한이고, 약이 새겨 나거나 이염 선고하면 책으로 만물을 보거나 소리로 만물을 분별하는 것은 전부 허구입니다. 약기 새겨 나거나 이염 선고하면 신행 사도입니다. 그 자체가 가짜 도라는 것입니다. 정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도는 무엇입니까?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모를 뿐입니다. 숭산 스님의 책입니다. 오직 모를 뿐입니다. 안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죄짓는 것입니다.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은 정도 사도가 아닙니다. 중도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정도와 사도가 있는데 중도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중도는 우리 지구 가운데 있는 물질에 속한 생명체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생명체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한 식구입니다. 저기 있는 사람이나 미국에 있는 사람이나 그 벨트 안에 들어 있는 한 가족입니다. 왜 전쟁합니까?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그러나 그 말도 맞지 않습니다. 안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제자들이 질문에 성철 스님은 죽을 때 돌아갈 때, “스님은 이제 많은 중생을 제도하고 갑니다”라고 하자, “내가 제도라니, 내가 무엇을 제도해? 전부가 다 부처인데”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냥 주둥아리로 여자들이 갖다 돈만 얻어먹고 사람 무관 지옥을 갈 것이다. 나 한 평생 여자들이 갖다 돈만 축내고 염불만 하고 앉아 있었는데 난 무관 지옥 가야 돼”라고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정도와 사도는 분리하면 그것이 정도가 아닙니다. 분별심에 걸려버립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분별심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고 이것은 나쁘고, 이 여자는 잘생겼고 이 여자는 못생겼다고 하는 모든 분별심에서 번뇌가 나옵니다. 탐진치가 분별심에서 나옵니다. 그것을 분별지라고 합니다.
업(業)의 소멸과 중도(中道)의 완성
신인님 말만 듣고 가면 됩니다. 내가 지금 누구하고 대화를 할 수 있냐면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와 대화를 하면 대화가 조금은 됩니다. 신인님의 사상을 기준으로 행동하면 보다 더 거짓말을 덜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거짓과 진실이 이런 것이 없습니다. 진의 여부 이런 것은 없습니다. 진짜도 거짓도 없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말입니다.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은 장기에 불과합니다. 우리 몸속에 위장도 있고 대장도 있듯이 지구에도 우리 많은 인간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강의를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아듣게 하느라고 재밌게 하는 것이지, 깊이 해 버리면 재미가 없습니다.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을 해 주는 것인데, 실제는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언과 어가 끊어질 단입니다. 언어도단 시대입니다. 말도 필요 없습니다. 경전도, 종교도 필요 없습니다. 진리도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 끊어진 세계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언어도단이 되어야 말을 하지, 언어도단을 넘어선 시대입니다.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말이 없는 세계입니다. 언어도단을 넘어서 버렸습니다. 말로 안 됩니다. 글로 안 됩니다. 경전으로 안 됩니다. 도로도 안 됩니다. 아무것도 안 통하는 것입니다. 다 끊어져 버렸습니다. 제자가 선생을 경찰에 고발하는 시대입니다. 무슨 도가 있습니까? 언어도단 때가 와야 미륵이, 메시아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언어도단의 시대입니다. 여기에 정도와 사도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은이나 어도 접근 안 되고, 도도 접근이 안 되는데, 거기에 정견이, 정도와 사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도 사도는 은이 있거나 어가 있어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다 없어진 시대입니다. 의미가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말세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도저히 그런 것이 젊은 애들한테 납득이 안 됩니다.
우리가 신구의 삼업(身口意三業)이 있습니다. 몸과 입과 뜻으로 마음으로 말을 합니다. 이 신구가 나왔다면 전부 업입니다. 신구의 삼업입니다. 입에서 말만 나오면 업이 되고, 몸이 여자만 만나면 업이 되고, 몸이 좋은 옷을 만나려고 하면 좋은 돈을 벌어야 하니까 남하고 싸우게 됩니다. 신구의, 몸과 입과 내 마음은 계속 업을 만들어 쌓아 올리는 수미산을 만듭니다. 업의 법칙은 계속 늘어나는 것이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인을 만나면 업이 소멸되고 축복으로 다 없애버립니다. 까르마를 계속 쌓아 가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자성자박(自繩自縛), 자정자력(自淨自力), 자작자수(自作自受),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습니다. 누구도 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자기 업은 자기가 만들어 자기가 업을 받습니다. 자업자득, 자성자박, 자정자력, 자작자수, 하여튼 전부 스스로 얻은 것입니다.
정도와 사도를 분리하는 자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정답은 무엇입니까? 무건건(無言)입니다. 말이 나갔다면 까르마입니다. 업을 짓는 것입니다. 여자가 있는데 “아이고 이쁘다” 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입니다. 그 여자가 이쁘다는 소리를 듣고 배우 되겠다고 뛰어다닐 수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피아노 치는데 “야, 너 피아노 참 잘 친다” 이 말에 뽕 해서 피아니스트 되겠다고 인생을 잘못 갈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 칭찬해 준 것도 그 업이 까르마가 됩니다. 미술 선생이 “야, 너 이러다 훌륭한 화가 되겠다”라고 하면 그 어린애가 화가 되겠다고 뛰어다니는 것입니다. 나중에 꿈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야, 너 그걸 참 잘 짓는다, 너 소설가 되겠다”라고 하면 그 애가 소설가가 됩니다. 그 선생 입에서 한 마디 나간 것이 까르마, 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이 그나마 정도입니다. 정도라는 이름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정도와 사도를 다 아우르는 것이 중도입니다. 가운데 중자입니다. 가운데 중도가 완성되면 싸우는 놈을 이놈이 훌륭한 놈이다, 저놈 틀린다, 이런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중도가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중도에서 바라봐야지, 선의 편에서 바라보면 편견이 되는 것입니다. 정견이 되려면 중도가 되어야 합니다. 악도 나쁘다 할 수 없고, 선도 좋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저 도둑놈이 어떤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내가 가서 먼저 그 도둑놈을 제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폭력을 쓴 것입니다. 우리는 굉장한 수도의 경지에 올라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중도입니다.
언어도단이기 때문에 스님께서 지금 오셔서 그 분별심이 없는 백궁으로 가는 사람들은 이제 분별심이 세상에서 끝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카르마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 카르마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축복은 내가 직접 주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고, 여러분이 여기 우유에다 결혼하다가 허행 쓰면 안 썩습니다. 그것을 무슨 축복이라고 합니까? 자연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아무한테도 자연 축복을 줄 수 있습니다. 지구인들은 말입니다. 내 이름을 미국 사람이 허경영 쓰면 우유가 됩니다. 불러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까르마가 없어진 것입니다. 까르마대로 놔두면 썩습니다. 업장이 있으니까 다 호갱이 서버리면 이것이 영원한 물질이 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그것만 가지고도 여러분은 까무러쳐야 합니다. 자연의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허경영 이름만 쓰면 됩니다. 하늘의 축복은 내가 직접 줘야 합니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연의 축복은 스티커, 지원 스티커는 경의 이름, 광입니다. 그것은 나한테 축복을 안 받는 사람,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안티들이 쓰면 썩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써도 좋아지는데, 안티가 쓰면 썩어 버립니다. 참 신기합니다. 오늘도 귀중한 차원이 높은 섭리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묵은 입을 닫는 것이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큰 사람들은 아예 말을 잘 안 합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그들이 하늘에 백궁 비자를 받은 자들은 아닙니다. 그 정도로 완성은 되어 있으나, 내 앞에 오면 그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