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감정, 공의에 대한 질문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신의 감정 표현인 공의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감정과 이성으로서 의사 표현을 하고 교류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인님께서는 인간적인 감정과 이성뿐만 아니라 신으로서의 공의를 표현하시기도 합니다. 성경 구절 중에는 신의 감정으로 사랑, 자비, 연민, 기쁨, 만족, 슬픔, 애통, 질투, 희망, 기대 등이 묘사되는데, 이는 글로 쓰여진 비유적 표현일 뿐 실제 신의 입장으로서의 뜻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초월적 느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질문은 신인님의 감정인 공의는 무엇인지, 인간의 감정과는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인간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인간의 의와 하늘의 의: 근원적 차이
공의는 인간의 의와 다릅니다. 인간의 의는 스스로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의롭게 한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로운 것은 하늘에서만 내려오는 것입니다. “의가 아니면 행하지 마라”고 하지만,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의는 정해져 있습니다. 인간은 그 의를 지킬 뿐입니다. 의는 하늘에서 준 법도이며, 인간이 하늘에서 준 법도를 지키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의는 인간 스스로 만들 수 없으며, 의를 행하는 인간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늘에서 의를 줄 때만 의가 존재합니다. 하늘이 정해놓은 의는 섭리입니다.
진리와 섭리: 세상의 두 가지 법도
인간이 정해놓은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섭리는 죄를 지었는데도 벌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섭리는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죽을 수 있습니다. 진리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건드리지 않지만, 섭리는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 배가 뒤집혀 수백 명이 죽는 것처럼, 섭리는 인간이 말하는 진리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대로 되는 것은 인간들의 일입니다. 하늘은 살인하지 않은 사람도 처벌할 수 있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땅에는 땅의 법이 있고, 하늘에는 하늘의 법이 있습니다. 하늘은 인간에게 의를 내려주며, “이런 의는 지켜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이 의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의라고 합니다.
칭의: 하늘의 의를 따르는 인간의 행위
여러분은 의를 ‘칭의’할 뿐입니다. 의를 따랐다고 칭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에게는 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라는 것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의는 하늘에서만 내려오는 것입니다. 의리를 지키면 의 뒤에 이치(理)가 붙어 의리가 됩니다. 의리는 이 의의 이치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의는 임금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음행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 속 의의 중요성: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성경에는 “무엇보다도 나라와 의를 먼저 지켜라”고 나옵니다. 다른 행위는 나중 문제이고, 하늘에서 내려온 그 의를 먼저 지킨 다음에 진리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의 의를 먼저, 나라와 의를 먼저 지킨 다음에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의가 제일 먼저 지켜야 하는 것인데, 그 의는 위에서 내려놓은 하늘의 법도, 즉 섭리입니다. 여러분의 의는 여러분이 의를 칭의하는 것이며, 의를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의는 의라고 칭할 뿐이지, 여러분의 의가 아니고 하늘의 의입니다.
도덕, 윤리, 그리고 하늘의 의
여러분에게는 도덕이나 윤리가 있습니다. 윤리나 도덕은 여러분이 하는 것이고, 진리나 이런 것은 여러분이 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의를 말합니다.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이 지구를 의미하고, 의는 그 지구에 하늘에서 준 법을 의미합니다. 그 의를 먼저 지키라는 것입니다.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한 다음에 너희들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의를 세우는 것, 즉 하늘과 인간의 관계가 의입니다.
공의와 사익: 섭리의 다른 표현
하늘에서 내려온 공의는 효도 등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개인의 출세와 같은 것은 사익입니다. 사익은 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공의와 사익도 원칙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공의라는 말을 하지만 실제는 칭의입니다. 공의라는 말 자체가 칭의와 칭위가 있을 때, 불의가 있습니다. 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불의하다고 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말을 안 들었다면 불효입니다. 칭의나 불의나 공의나 사익이 있습니다. 사익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때 사용합니다. 공의나 칭의를 지키지 않는 것을 불의하다고 합니다. 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법도입니다. 인간들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지켜야 합니다. 먼저 지키기 전에 지키라는 말은 무엇보다도 의를 제일 먼저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위가 있는 것입니다.
공의는 섭리이다
공의는 사익의 반대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실제로 없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사적인 것을 추구하니까 제가 공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한 단계 낮춰서 공의를 이야기한 것이지, 실제는 공의라는 것은 섭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 사적인 것으로 나가니까 공의가 나오는 것이지, 실제는 성경에 그냥 의라고 합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지키라”고 하지, “공의를 지키라”는 말은 성경에 없습니다. 공의가 있으면 사의가 있어야 하는데, 하늘의 의는 공과 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명령입니다. 하늘의 뜻이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하늘의 뜻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공의를 개인적으로 쓸 때는 공동의 의라고 합니다. 공동의 이익이 되는 것을 사람들은 공의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공익입니다.
의는 무엇에도 붙지 않는 절대적 가치
공의라는 말은 결국 섭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의는 무조건 앞에 공이나 사와 같은 것을 붙이지 않습니다. 칭이나 불의와 같은 것이 붙으면 일단 천벌을 받는 것입니다. 의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라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이 모든 성경에서 다 쓸데없고 먼저 의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그다음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의를 할 때 공의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공의도 어떤 말로 쓰냐면 공익으로 쓰는 것입니다. 공익으로 쓰는 것을 공의로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도 여러분이 사적인 것을 하니까 제가 공의를 이야기해 준 것입니다. 공의는 섭리입니다. 원 공의는 틀린 말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공의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하려면 이것을 공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공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의 품성입니다. 하늘의 뜻을 제일 먼저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공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쓴 공의인데,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공동체라는 뜻이고, 이것은 공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하늘의 뜻입니다.
공무와 공의: 인간의 일과 하늘의 뜻
공무원 할 때 이 공(公)자를 씁니다. 공무원은 나라의 뜻을 이어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공무입니다. 공무원은 국가의 뜻을 이어가는 자들입니다. 공무라고 합니다. 공의는 하늘의 뜻입니다. 의와 무가 다릅니다. 의는 하늘의 것을 말하는 것이고, 무는 인간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공무의 반대는 사무입니다. 사적인 일입니다. 공의에는 사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공의가 하나의 의라는 뜻을 인간들이 알아듣기 쉽게 풀어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섭리입니다. 섭리가 공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라 섭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자가 공의라는 말입니다. 공의를 먼저 지키라는 것입니다. 의는 하늘에서 내려와서 정해놓은 것입니다. 섭리는 정해져 있습니다.
진리의 변화와 섭리의 불변성
진리는 땅의 것이므로 바뀝니다. 옛날에는 상투를 꽂아야 진리였습니다. 독립운동하던 사람들이 불편하니까 상투를 잘라버렸습니다. 일본 사람처럼 위장하고 다녀야 했기 때문입니다. 상투를 꽂고 독립운동을 다니다가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상해나 러시아도 가야 하는데, 상투를 꽂고 다니면 한국 사람이라고 알아볼까 봐 머리를 자르고 일본 사람처럼 위장하여 일본인 속에 들어가 총을 쏜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상투를 꽂고 있었으면 이토 히로부미를 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상투는 진리 쪽에 속한 것입니다. 상투가 있을 때는 조선 시대의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투를 꽂고 다니면 그것이 진리일까요? 아닙니다.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보편타당한 것이 진리입니다. 시대와 흐름에 따라 바뀌어 버립니다. 옛날에 남자도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녔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시대의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중이들이 머리를 깎는 것은 지금 현재도 진리입니다. 아주 옛날에는 머리를 깎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머리를 깎았지, 그 사람들이 머리 깎는 기계도 없었습니다. 석가모니 머리를 보면 곱슬곱슬한 것입니다. 요새 와서 이발기가 나와서 머리를 자르지, 어디 스님들이 머리를 이렇게 자르고 다닐 수 있었겠습니까? 전부 머리를 기르고 다니다가 묶고 다녔습니다. 현대에 와서 이발기가 생겨서 머리를 깎은 것입니다.
공의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하늘의 섭리
공의는 하늘의 섭리와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공의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나가다가 쓰레기를 버리면 진리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공의에 걸리는 것입니다. 환경을 파괴한 것에 대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쓰레기를 버렸다고 판사나 형사가 와서 잡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공의에 환경을 파괴한 것입니다. 환경 파괴를 몰래 하면 실제 공의를 어긴 것이지, 진리를 어긴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법을 만들어 법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공의는 십계명이나 불교의 여덟 가지, 열 가지 시박 중죄와 같은 것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육법전서로 통제하고 있지만, 공의는 육법전서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우주에서 우리의 레벨을 통제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하늘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공의의 구체적 사례: 소를 키우는 농부와 살생
농부가 소를 키워 잡아먹는 것은 하늘에서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소가 풀을 뜯고 있는데 재미로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은 공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소를 키워 그 소를 팔아 고기를 나누어 먹고 동네 잔치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소도 거기에 희생되어도 억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멀쩡히 풀 뜯고 있는 남의 소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은 재미로 소를 죽이는 것이므로 공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라고 심심하면 가서 찔러 죽이는 것도 안 됩니다. 진리에서는 아무 상관없지만, 하늘에서는 그 사람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공의를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률이 있어도 그것보다 먼저 공의를 지켜야 합니다. 의를 지켜야 합니다.
의는 백의 근본이자 겸손의 상징
의는 백의 근본입니다. 의 밑에 효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벽에 인, 의, 예, 지, 신이 있습니다. 사랑이 첫 번째입니다. 의는 공의입니다. 이렇게 표현할 때 이것을 공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의, 지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관계된 것은 의입니다. 다른 것을 먼저 지키라고 하지 않고 의를 먼저 지키라고 합니다. 의가 되게 무서운 것입니다. 의(義)는 양(羊) 밑에 나(我)가 있는 글자입니다. 양은 예수를 상징합니다. 내가 예수 밑에 들어가야 합니다. 양 밑에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의가 되고 미가 됩니다. 미(美)는 살찐 큰 양을 의미합니다.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의는 행동할 때 겸손을 의미합니다. 겸손이 의의 상징입니다. 겸손이라는 그릇이 세상에서 제일 큽니다. 의는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의를 지키는 것은 하늘 앞에 겸손하라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는 것입니다. 임금 앞에 고개를 돌리면 의를 저버린 것입니다. 임금을 꼬아보면 예를 저버린 것이 아니라 인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임금과 신하는 의가 제일 중요합니다. 오덕 중에 예지신은 필요 없고 의 하나가 필요합니다. 하늘과 인간 사이에 필요한 것이 의입니다. 임금과 신하는 임금을 하늘로 보는 것이므로 의가 필요합니다. 예나 인이나 신은 필요 없습니다. 군신유의입니다. 무엇보다도 의를 지키라는 것이 하늘의 지상 명령입니다.
공의와 군신유의: 하늘과 인간의 관계
여러분은 공의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공의가 있고, 그다음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그다음에 백성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나라, 즉 임금의 나라와 의를 먼저 지켜야 합니다. 군신유의입니다. 부자유친은 아버지와 자식은 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어려워하면 그 집안은 망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미리 물어보고, 잘못했으면 아버지에게 가서 사과하고, 아버지와 허물이 없어야 합니다. 친할 친(親)자는 대문 앞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 아버지가 어머니가 언제 오시나 쳐다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부자지간은 이래야 합니다. 엄마가 어디 갔다 오면 나무 위에서 눈 빠지게 쳐다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오겠지, 안 죽고 오겠지 하는 놈은 불효자식입니다. 이것은 오륜이고 삼강입니다. 삼강에서는 군신을 군위신강이라고 합니다. 부자유친도 오륜인데, 삼강에서는 그 해석이 의입니다. 여기는 친입니다. 인간의 하늘과 땅은 친이고, 나라의 하늘과 땅은 의입니다. 신과 인간도 의입니다. 신인유의입니다. 무엇보다 의를 하라고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의는 겸손, 신에 대한 태도
의는 겸손입니다. 신이 보이면 신 앞에 신발 벗고 제단 앞에 가서 아브라함이 절하듯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아, 너 신발을 벗어라”고 합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와서 나갈 때는 엉덩이를 보이고 나가면 안 됩니다. 지금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갔다가 그냥 나가는 것은 원래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가 저기 있으면 나갈 때 전부 뒤로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신 앞에 엉덩이를 보이고 나가겠습니까? 이것은 불법입니다. 지금 교회가 그러고 있습니다. 들어갈 때는 들어가도 나올 때는 뒤로 뒷걸음쳐서 나가야 합니다. 시아버님이 있는 방에 며느리가 들어갔다가 그냥 나가면 걸립니다. 뒷걸음쳐서 나가야 합니다. 문 앞에 가서는 몸을 돌려야 합니다. 문 앞까지는 아버님 저기 앉아 있으면 물 갖다 드리고 뒷걸음질로 쫄랑쫄랑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엉덩이를 팩 돌리고 가면 며느리가 교양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임금과 신하 사이라는 것은 하늘과 인간 사이와 비슷하게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배당에 가서 그냥 들어갔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제 앞에서 다 엉덩이를 보이고 나갑니다. 실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노래 부르러 나오는 아이들이 나갈 때 뒷걸음쳐서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냥 걸어서 가면 예의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