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윤리, 그리고 법: 사회를 지탱하는 공동체의 합의
양심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와 사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칭했듯, 인간과 사회, 그리고 양심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의 양심은 현 사회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에만 국가 운영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양심이 모여 윤리가 되고, 윤리가 모여 법이 됩니다. 법은 공동체의 공통된 양심이 “우리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징벌하자”와 같이 합의에 이르러 만들어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윤리와 도덕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점차 법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개인 양심의 자유와 공동체 법의 충돌
법은 공동체의 양심을 대변하지만, 개인의 양심은 법의 형벌을 받더라도 자신의 자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법정에서 형을 선고받아도 속으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양심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으며, 판사도 강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 법은 이러한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여 진술 거부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헌법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에, 법은 이를 허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 지역, 국가에 따른 양심의 다양성
양심은 종교, 지역, 국가에 따라 다르게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불교 신자는 벌레를 죽이지 않기 위해 비행기로 무전여행을 가려 하고, 기독교 신자는 비행기 매연으로 인한 환경 파괴를 우려하여 걸어서 가려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마다 양심의 기준이 다릅니다. 북한 어린이들의 양심은 남한을 적으로 여기는 것처럼, 지역과 국가에 따라서도 양심은 달라집니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와 독립운동가의 양심 또한 달랐습니다. 친일파는 일본의 박해로부터 민족을 보호하려 했다고 주장할 수 있고, 독립운동가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역사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양심은 때로는 자신의 죽음을 불러일으키더라도 꺾이지 않는 강한 신념이 되기도 하지만, 생존을 위해 양심을 팔아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력 신앙과 타력 신앙: 종교적 양심의 근본적 차이
종교적 양심은 자력 신앙과 타력 신앙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불교는 자력 신앙으로, 스스로 깨달아 해탈에 이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신의 도움 없이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양심의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타력 신앙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자신을 버리고 예수를 받아들임으로써 신앙이 생기며,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는 희생정신을 강조합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이 지은 죄의 벌을 철저히 받아야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대신 죄를 가져가 주신다고 믿습니다. 이처럼 종교마다 진리 자체가 다르며, 그들의 양심 또한 자력 기반과 타력 기반으로 다릅니다.
헌법: 다양한 양심을 통합하는 공동체의 법
우리나라에는 약 4,600여 개의 종교가 존재하며, 각 종교마다 양심이 다릅니다. 이처럼 다양한 양심을 통합한 것이 바로 헌법, 즉 우리의 법입니다. 헌법은 모든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양심을 모아 공동체의 법으로 규정합니다. 미국의 연방 헌법이 50개 주마다 다른 법과 양심을 통합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낙태 허용 여부가 주마다 다를 경우, 낙태가 허용되는 주로 이주하여 낙태를 진행해야 법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마약(대마초) 허용 여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양심은 지역과 법에 따라 묘하게 달라지며, 이를 통합하는 것이 헌법의 역할입니다.
진리의 두 가지 얼굴: 영원한 진리와 변화하는 진리
진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 흐름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보편타당한 만물의 이치, 즉 영원한 진리입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처럼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진리입니다. 둘째는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진리입니다. 원시시대에는 상투를 꽂는 것이 보편적이었지만, 지금은 머리를 자르는 것이 보편타당한 것처럼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진리입니다. 영원한 진리는 ‘양의 진리’이며, 변하는 진리는 ‘음의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월 신앙: 자력과 타력을 넘어선 진정한 종교
자력 신앙과 타력 신앙 모두 나름의 문제가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는 이 둘을 초월한 ‘초월 신앙’입니다. 이는 기존 종교의 틀 안에서 나타나지 않고, 마치 도둑처럼 엉뚱한 곳에서 나타나는 메시아를 통해 구현됩니다. 불교인, 기독교인, 천주교인, 이슬람교인 등 모든 종교인이 함께할 수 있는 종교의 판 밖에서 오는 것입니다.
섭리적 양심: 신의 마음과 생명나무, 선악과
섭리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양심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신의 마음, 즉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섭리적 양심은 생명나무를 건드리는 것과 선악과를 건드리는 것에 위반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를 건드리는 것은 원망, 불신, 교만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뜻대로 사는 자라면 원망과 불만과 교만이 없어야 합니다. 이는 남에 대한 사랑이 없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교만으로 즐거워하지만, 이는 섭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신의 양심, 신의 가슴입니다. 인간이 신의 심판관이 되어 “넌 틀렸어”, “넌 나쁜 놈이야”라고 재단하고 재판하는 것은 말세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이 반반 섞인 중간자이므로, 누구를 100%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책임: 범죄의 근본적 해결과 사회주의적 접근
인간이 하는 재판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범죄의 문제는 국가의 책임이며, 국가가 이를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기를 쳤다면, 왜 사기를 치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돈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면, 돈이 어려운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 해결해야 합니다. 법정이 아닌 해결사들이 나서서 문제점을 해결하고, 그 가족들까지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무조건 감옥에 가두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오히려 더 악랄한 범죄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자가 나오면 공무원들이 둘러앉아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사기 친 돈은 돌려주게 하고, 취직을 시켜주는 등 근본적인 해결을 해주면 범죄자도 죄를 짓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사회주의의 역할: 범죄율 감소와 복지 보장
사회주의는 범죄율을 줄이는 데 효과적입니다. 국가가 국민의 50%를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선의의 경쟁을 시키되, 낙오자들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책임져 줌으로써 도둑질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스웨덴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는 범죄율이 낮습니다. 자본주의는 능력 위주의 무한 경쟁을 시키며, 낙오자에 대한 대책이 없습니다. 개인에게 무한 책임을 돌리기 때문에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헤어날 길이 없어 빚에 쪼들리게 됩니다. 이는 엥겔 지수를 높여 돈은 벌어도 쓸 돈이 없는 상황을 만듭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 그리고 신정주의로의 전환
현재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를 겪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언젠가 사회주의로 전환되는 것이 정상적인 흐름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정주의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국가가 100% 책임을 지지만 발전이 없어 채택되지 않고 있으며, 자본주의 또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전 세계는 점차 사회주의화될 것이며, 모든 사람의 복지가 당연히 받을 권리가 되는 사회가 올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제도는 이미 사회주의화되어 있어, 없는 사람도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있는 사람이 부담하는 구조입니다. 사회주의는 복지라는 단어를 붙일 필요 없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가 되는 체제입니다.
양심의 자유: 어디서나 보장되는 개인의 권리
양심은 사회를 통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양심은 탄압을 받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자유를 가집니다. 종교의 자유, 정치적 투표의 자유 등 양심의 자유는 어느 나라에서나 보장됩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것은 국민의 양심의 자유였습니다. 때로는 편히 살기 위해 양심의 자유를 바꿀 수도 있지만, 거짓말할 자유 또한 생존을 위한 개인의 방법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사회가 생존 수단을 제공하지 못할 때, 거짓말이라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