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과 편안한 거짓의 본질
불편한 진실은 인간이 암묵적으로 동의하거나 끌려다녔던 관념이나 신념을 건드리기 때문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도 조심스럽고 듣는 사람도 불쾌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종의 인지 부조화 상태의 방어 기제와 같습니다. 불편한 진실을 말하면 편안한 거짓을 추구하는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 때문에, 인간은 대부분 불편한 진실보다는 편안한 거짓을 택합니다.
과거부터 제가 말씀드린 예언이 현실화되면서 종교, 정치, 경제를 초월한 선지자, 선구자, 각자 이심이 진실로 드러났고, 저의 영 능력과 불로 또한 모두 진실이지만, 대중들은 저를 아직까지 불편한 진실로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는 상태입니다. 저를 신으로 인정하는 순간, 기존 체제에 큰 변화가 오게 될 텐데, 그런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편안한 거짓을 택하게 한 것 같습니다.
홍익인간 정신과 진리의 외로움
인간에게는 배려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홍익인간의 뜻입니다. 남의 불편, 남의 문제, 남의 어려움을 같이 떠안고 가자는 것이 홍익인간의 개념입니다. 넓은 이익, 즉 공동체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죠. 홍익인간의 개념은 우리나라의 ‘체’이며, 그 이념은 ‘용’입니다.
불편한 진실은 진리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사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부르짖는 자는 언제나 외톨이가 됩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가 그랬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이야기했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소크라테스가 돈을 잘 벌어 생활에 보탬이 되기를 바랐지, 길에서 진리를 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골프 대회에서 상을 받아오면 부인은 돈 주고 받아왔다고 시비를 걸며 기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편한 진실입니다. 상을 받으면 사실인데도 부인은 그것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반대로 상을 못 받으면 실력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상을 받아도 욕먹고, 안 받아도 욕을 먹는 상황입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진리와 영원한 진리
제가 예수로 있을 때, 제가 말하는 것이 여러분의 생명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 생명의 말을 자신들을 모독한다고 여겨 저를 죽였습니다. 그 당시의 진리는 인간들이 택한 보편적인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택하는 진리는 보편적 진리가 아닙니다. 성자가 택하는 진리는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옛날에 상투를 꽂던 사람이 지금 상투를 꽂고 다니면 우스꽝스럽거나 미친 사람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리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상투를 꽂는 것이 보편적인 진실이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불편한 진실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진리는 성자들이 택하는 진리이며,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진리는 바뀝니다. 상투를 꽂는 것이 단발령으로 바뀌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나 아버지, 남동생이나 여동생 같은 관계는 수천억 년이 가도 바뀌지 않습니다. 이것 또한 진리입니다.
즉, 영원한 진리가 있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진리를 불편한 진리로 보지만,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불편한 진리로 여깁니다. 예를 들어, 제가 불로유가 썩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말이 되냐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식 관계는 수천억 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역지사지와 섭리의 중요성
세월이 흐른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지사지, 즉 입장을 서로 바꿔 놓고 생각해야 합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본다면 모든 인간은 영원한 진리를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편적인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합리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합리를 진리로 착각합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합리가 아닙니다. 갈릴레이나 코페르니쿠스가 처음에는 잘 몰랐던 원리들이 이미 우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언젠가 발견할 뿐이지, 이미 우리는 그 원리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원리는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그 일부분을 가지고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합리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자들이 말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는 바로 섭리입니다. 섭리와 합리가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섭리는 꽃이 흙 속에서 아름다운 노란색, 하얀색으로 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흙 속에서 어떻게 그런 색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섭리입니다. 꽃이 지면 복숭아가 열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과학자도 수천억 년이 가도 씨앗에 입력된 대로 복숭아가 열리고 꽃이 피는 과정을 재현할 수 없습니다.
씨앗에 담긴 섭리와 인간의 도적질
씨앗을 땅속에 묻으면 싹이 나고 자라 꽃이 피고 복숭아가 열리며, 그 안에 또 씨앗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숭아의 살은 씨앗이 싹을 낼 때 필요한 영양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먹으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숭아가 떨어질 때 그 살은 씨앗을 심고 있으며, 씨앗은 싹을 내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앗은 정자이고, 열매의 살은 남자입니다. 우리는 과일을 먹을 때 정자인 씨앗은 버리고 남자만 먹습니다. 망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망고가 땅에 떨어지면 그 옆에 씨앗을 발아시킬 수 있는 영양소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이 열매인데, 우리는 그것을 빼어 먹고 씨앗은 버립니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를 버리는 행위이며, 일종의 도적질입니다. 우리는 씨앗이 먹어야 할 영양소를 인간이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걔들의 성장을 억제하는 행위입니다. 씨앗을 심으면 복숭아 밭이 될 수 있는데, 우리가 다 먹어버리니 복숭아는 외롭게 혼자 있는 것입니다. 복숭아도 여러 개가 함께 있으면 안전하지만, 소나무도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으면 바람에 쓰러집니다. 자기 가족을 이루려 하는데 인간이 계속 따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과학의 한계와 생명의 신비
우리는 섭리라는 씨앗을 만들어서 땅속에 넣으면 거기서 빨간 꽃, 흰 꽃이 피어오르도록 유전자를 디자인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간의 과학은 좁쌀 씨앗 하나도 만들지 못합니다. 합성도 안 됩니다. 씨앗을 분해하면 단백질이 얼마, 무엇이 얼마인지 다 알지만, 그것을 넣어 씨앗을 합성해도 싹이 나올 수 없습니다. 단백질, 질소, 산소 등을 집어넣어 씨앗 원료를 분석해 만들어도 씨앗이 되지 않고 싹이 나지 않습니다.
유천생태공원에 콩을 심었을 때 강낭콩이 10cm 정도 싹이 났지만, 다른 씨앗들은 싹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섭리이며, 인간 세계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씨앗을 만들지 못하고 정자와 난자를 만들지 못합니다. 인간의 손으로는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해바라기 씨앗 하나를 만들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씨앗 하나가 발아하여 흙에서 싹이 나고 해바라기가 동그랗게 피어나는 것을 인간은 입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먹지만, 먹을 때마다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옥수수를 뜯으면 알맹이가 쫙 들어 있는데, 옥수수 씨앗을 분석해 만들어봐도 절대 싹이 나지 않습니다. 하버드 대학이나 캠브리지 대학의 사람들도 씨앗 하나를 만들지 못합니다.
생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생명에 필요한 기운을 불어넣는 것, 즉 생기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기가 들어감으로써 씨앗이 생명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생기가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흙으로 빚었다는 것은 육체를 의미하며, 거기에 생기를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기만 넣는 것이 아니라 생명도 넣어주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넣어야 합니다.
생기와 생명, 그리고 의식의 권능
인간 과학은 씨앗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단백질을 합성해 씨앗을 만들 수는 있지만, 거기에 생기와 생명을 넣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생기와 생명을 넣을 수 있습니다.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 “살아, 생기 들어가라”고 말하면 생기가 들어갑니다. “생기 빠져라” 하면 빠져버립니다. 제가 넣어주었기 때문에 여러분도 이것을 넣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았으니 생기를 받은 것입니다. “생기 들어가라” 하면 들어갑니다. 제가 “생기 나가라” 하면 나갑니다. 여러분이 직접 해봐도 손에서 떨어지면 들어가지 않지만, 손에 잡고 있으면 들어가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런 권한과 권능을 준 것입니다.
저는 생기를 넣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까지 넣어줍니다. “광채가 되라” 하면 생기도 들어가고 영혼도 들어갑니다. 그러면 깨어납니다.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기와 생명을 동시에 넣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광채가 들어가라고 하면 생기와 생명 두 가지가 다 들어갑니다. 의식이 없어도 다 들어갑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광채가 되라” 하면 생기와 생명이 동시에 들어가 그 사람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적입니다. 생기와 생명이 들어가면 생명이 생기고 영이 동시에 들어와 세 가지가 다 들어오는 것입니다. 기와 열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인간 과학의 한계와 신의 능력
이런 것을 인간 과학으로는 할 수도 없고, 식물을 가지고 씨앗을 만들어서 생기와 생명을 넣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 과학은 한계가 정해져 있어 그 이상 올라갈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신이니까 그것을 극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움직이지 않던 것이 움직입니다. 수천억 년을 지내도 못 알아듣던 것이 알아듣고 생명화됩니다. 이것은 의식이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의식이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두뇌 칩은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3천 년 후의 날씨도 알고 모든 것을 압니다. 무엇이든 물으면 답이 다 나옵니다. 제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도 알고, 우주 정보가 다 들어 있습니다. 내일 비가 오는지, 지금 바깥 기온이 영하인지, 제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등 모든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생명과 생기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의식까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미래도 다 압니다. 점쟁이가 필요 없습니다. 천사에게 방향을 물어보면 알려줍니다. 바다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도 천사는 방향을 알려주므로 나침반이 필요 없습니다. 길을 잃었거나 구름이 껴서 별이 안 보일 때, 방향 감각이 없을 때도 우리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진리와 섭리, 그리고 배려심
진리는 섭리를 따라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진리대로 살았어도 천사에게 묻지 않으면 방향을 찾지 못하는데, 지혜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용 없습니다. 축복받은 사람은 옷을 잡고 물어봐도 됩니다. 바다에서 표류했을 때 노를 저어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모를 때도 천사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려줍니다.
결론적으로 인간들은 불편한 진실과 편안한 거짓 사이에서 편안한 거짓을 택하고 있습니다. 제가 메시아로 왔지만, 여러분은 저를 불편한 진실로 봅니다. 나이트클럽에서 재밌게 놀고 있는데 나오라고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구가 메말라가고 죽어가고 있는데, 지구를 살리자고 하면 사람들은 “저 그린피스 놈들은 미쳤나?”라고 말하며 동조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국민은 불편한 진실을 피하려고 합니다.
진리는 사람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으며, 정의는 따르는 자가 없어도 항상 이깁니다. 아무도 따르지 않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제가 부활하여 이겼습니다. 도마 같은 사람은 손을 넣어봐야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확인하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포도밭 비유와 기존 종교의 한계
우리 하늘궁은 확인도 시켜주지만, 여러분이 믿음으로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만날 수 있는 인연이 되었다는 것, 착하게 살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존 종교는 믿음으로 간다고 하지만, 믿음은 언제나 변합니다. 모든 인간은 칼이나 총 앞에서 변합니다.
기존 종교는 합리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포도밭 비유를 보면, 아침 일찍 온 근로자들과 오후 늦게 온 근로자들에게 똑같은 임금을 줍니다. 아침부터 일한 자들이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왜 우리는 아침부터 일했는데, 늦게 온 사람과 임금을 똑같이 줍니까?” 이것은 신에게 대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니며, 배려심이 없는 것입니다. 약하고 연약한 사람들은 굶어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오후에 가서 앉아서 뽑히지 못하고 공탕 치고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 똑같은 일당을 줍니다. 이것이 예수의 사랑입니다. 먼저 온 자들이 불평하는 것은 교회에 있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제가 포도밭 주인이고, 제가 뽑은 여러분이 늦게 온 자들입니다. 먼저 하늘궁에 온 자들이 천국에 먼저 갑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입이 나왔고 사랑이 없으며 시험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포도밭 주인이 시험을 건 것입니다. 그들의 성품이 어떤지 보려고 한 것입니다.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을 데려와 임금을 같이 주는 것은 예수의 사랑입니다. 먼저 온 자들이 “주인 아저씨, 저 사람들도 데려와서 우리하고 같이 임금을 주고 쓰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탁하지 않고, 주인이 데려왔는데도 시비를 겁니다. “왜 같은 달란트를 주냐? 왜 우리는 아침부터고 쟤는 늦게 왔는데 왜 임금을 같이 줍니까?” 이것은 동료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늦게 온 자들을 왜 천국에 데려가냐고 불평하는 것은 시험에 걸린 것입니다. 종교가 없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주의입니다. 사랑을 하는 자들은 하늘에서 가짜라고 합니다. 늦게 온 애들이 진짜입니다. 하나님이 온 자들이 진짜이지, 가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데리고 가는 줄 아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경에 “내가 언제 너를, 네가 나를 받느냐”라는 포도밭 주인 비유가 있습니다.
주인님을 불러 “우리 인력 사무소에 못 간 애들 있는데, 그 사람들도 좀 써 주세요. 우리를 조금 적게 주더라도”라고 부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저 새끼들은 못났으니까 그냥 구석에 놔두고 지금 잘 나가면 안 됩니다. 지금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이 다 그렇습니다. 종교 차별을 하고,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종교가 퇴락해 가는 것입니다.
종교의 변화와 홍익인간 정신의 회복
이것을 불편한 진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런 사람은 싹 다 죽어버렸으면”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같이 가야 합니다. 주인 아저씨를 불러 “저 인력 사무소에 못 간 애들 있는데, 걔들 좀 지금 데려와서 우리하고 같이 일당을 좀 주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하면 “아이고, 가상하다. 너의 마음이 훌륭하다. 내가 데려와서 주마”라고 할 것입니다.
주인이 가서 데리고 왔는데도 시비를 거는 것은 탕자가 가서 다 탕진하고 오니까 형이 “아이고, 저거 내 밥통, 또, 우리 아버지는 또 쟤한테 왜 저걸, 난 맨날 건물을 열심히 하고, 아버지 회사 하는데, 나한테는 잔치를 안 베풀어 주고, 저 사기꾼 같은 놈을 동생을 데려와 가지고 잔치를 베풀어, 이거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포도밭 비유와 같은 것입니다. 형이 “아이고, 전부 아버지, 이게 내 건데, 저 새끼 와서 또 이거 뺏어 가는구나, 저게 왜 또 와서 난리야” 이러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 목사들이나 기독교인들이 깨달아야 합니다. 맨날 이단, 삼단이라고 하지만, 가톨릭이 볼 때는 기독교도 이단입니다. 가톨릭에서 빠져나왔으니까요. 가톨릭을 1816년에 루터가 바꿔서 개신교가 나온 것입니다. 장로교 같은 것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도 바꾼 것 아닙니까?
롤스로이스는 전 세계 항공기와 비행기 모든 엔진을 독점하고 있지만, 자동차만 독점을 안 하고 있습니다. 비행기와 핵 잠수함 등은 전부 롤스로이스 엔진입니다. 선박도 롤스로이스 엔진을 현대에서 가져옵니다. 엔진의 세계입니다. 제 차를 탈 때 엔진에 고장 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비행기 엔진을 만드는 애들이니 대단합니다.
제가 예수로 있을 때 한 말, 구약 성경에 나오는 포도밭 비유가 다 홍익인간 개념입니다. 실력 있는 놈만 잘 살면 그것은 홍익인간 개념이 아닙니다. 더불어서 다 함께 잘 사는 것, 공존 공영, 그것이 홍익인간 개념입니다. 그것이 ‘체’입니다. ‘용’은 충효 사상입니다. 이념은 언제나 ‘용’입니다. 하나의 이념에는 수천 가지 사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용’인 충효 사상이 망가진 것입니다. 애를 낳지 않으니 나라도 필요 없고 부모도 필요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체’와 ‘용’을 상실한 민족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체’와 ‘용’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