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Huh Kyung-young’s High-Level Explanation of Easily Confused Truths: Distinguishing Between Eternal and Changing Truths – September 8, 2023

진리와 신의 마음: 인간과 신의 경계

오늘은 진리와 신의 마음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신인께서는 과거 강연에서 인간의 마음이 신의 마음과 일치할 때가 진리이며, 인간의 마음이 신의 마음보다 과도하면 진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역사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보편타당한 이치인 객관을 개인의 주관이 침범하면 그것 역시 진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신의 마음을 넘어서는 안 되는데, 인간들은 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는지, 인간과 신의 마음의 경계는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역사나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하는 보편타당한 이치인 객관처럼 신의 마음도 각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신의 마음은 여러분의 마음과는 다릅니다. 인간의 뇌에서 나오는 것이 마음이지만, 신은 영성이기에 마음이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인간들의 마음을 지켜보는 존재입니다. 신은 자동 시스템을 통해 선과 악이 자동으로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설정해 놓았으며, 직접 개입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들은 수십억 년, 수백억 년 동안 자동적으로 진화하거나 퇴화합니다. 점점 나쁜 길로 가는 자가 있고, 점점 좋은 길로 가는 자, 이렇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원시반본과 환부역조: 순수성 회복의 중요성

원시반본(原始返本)은 죄를 짓고 스스로 뉘우쳐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계속 죄를 짓는 행위는 환부역조(換父易祖)와 같습니다. 이는 조상을 팔아먹고 아버지를 바꾸는 행위입니다. 지금 세대들은 환부역조 세대입니다. 원시반본을 해야 하는데, 환부역조를 하는 세대입니다. 인간의 순수성이 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은 때가 묻었으니, 때 묻지 않았던 때를 생각하며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너무 물질에 물들지 않았나’ 하고 반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5천만 원이 든 보따리를 동사무소에 놓고 간 사건이 CCTV에 찍혀 뉴스에 나왔습니다. 한 할머니가 5천만 원이 든 봉투를 보따리 하나 들고 와서 동사무소에 놓고 살짝 나갔습니다. 그 안에는 편지가 들어 있었는데, 자신이 몇 년간 적금 들어 탄 돈 5천만 원을 밥 못 먹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써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글씨는 엉망이었고, 한글도 잘 쓰지 못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자신도 넉넉하지 않지만, 이 돈을 어려운 이웃에게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5만 원짜리 지폐로 5천만 원, 적금 탄 돈이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자신과 같은 어려운 시절을 겪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 돈을 동사무소에 놓고 나간 것이 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물질적 재능 기부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즘 사람들은 갈수록 그렇지 않습니다. 배은망덕은 만사를 망치게 합니다.

객관과 주관의 경계: 진리의 변화와 선견지명

이 질문은 객관과 인간의 주관에 관한 것입니다. 객관을 넘어서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인간의 주관이 객관을 넘어서면 그것은 일반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일반적인 진리는 역사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보편타당한 만물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투를 하지 않는 시대에 어떤 사람이 끝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고 부모에게 대들며 “나는 상투를 할 거예요. 조선 시대의 것을 지켜야 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객관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한 것입니다. 객관을 인정하지 않고, 주변이 변하는 것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그대로 해야지, 왜 우리가 이렇게 나라 이름도 바꾸고 머리 상투는 왜 잘라버렸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원칙만 계속 주장합니다. “상투, 우리 할아버지도 상투했는데 왜 우리가 쌍놈들처럼 머리를…” 너무 골치 아픈 주장입니다.

진리는 전통을 지키는 것만이 진리가 아닙니다. 역사 시대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보편타당성은 순리를 따라가는 것, 그것이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따라서 객관이 주관을 넘어서면 안 되고, 주관이 객관을 넘어서면 안 됩니다. 객관적인 사실들이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선견지명일 경우에는 주관이 객관을 앞지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다수결은 모두 하지 말라고 하지만, 선지자는 그 다수결을 넘어설 수 있으며, 그것이 진짜 진리가 됩니다. 그 진리가 변화되고 있는 것을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진리가 이미 변화하고 있는데, 저수지 둑이 터질 것 같은데도 터져야만 아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이상 없는데요”라고 말하지만, GS에서 지은 아파트 주차장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금수관들이 검사해서 합격시켰습니다. 그들의 객관은 주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 하나는 “이거 문제 있다”고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습니다. 선구자, 선지자, 선각자는 미친놈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관이 객관을 앞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객관들은 아직까지 밤처럼 깜깜하여 앞을 내다보지 못합니다.

영원한 진리와 보편적 진리: 두 가지 진리의 이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아이를 낳아야 하냐, 왜 결혼하는데 이렇게 나에게 대드냐, 나는 너희 마음대로 해라, 나라가 망하든 말든 나는 이럴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관이 객관을 넘어서려고 할 때, 객관들은 이 주관을 유심히 관찰해야 합니다. 언제나 객관이 주관을 앞서는 것은 아닙니다. 간디는 다른 사람들이 항상 전쟁으로 나라를 빼앗으려 할 때, 반대로 평화를 주장하여 평화를 얻었습니다. “아, 그래요?” 보편적인 진리는 역사 시대의 흐름에도 하나 변화하는 보편타당한 만물의 이치입니다. 이것은 객관성이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는 관계없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보편타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가도 아버지와 아들이지, 아들이 아버지가 되는 시절은 오지 않습니다. 영원히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진리이며, 하늘의 진리입니다. 땅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땅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진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객관성 있는 진리는 먹고 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수단이지, 지혜가 아닙니다. 예수가 주장한 것은 아무 객관성이 없었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를 추종합니다. 그때는 예수를 미친놈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예수를 인정합니다.

대소장단과 중경후박: 세상의 이치를 포용하는 지혜

객관과 주관에 혼돈이 있으면 철학을 공부할 수 없고 세상을 알 수 없습니다. 대소장단(大小長短), 중경후박(重輕厚薄), 즉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무겁고 가볍고, 두텁고 얇은 것이 분리되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보면 대소장단은 다르지 않습니다. 미추(美醜), 선악(善惡), 애정(愛情), 즉 아름답고 추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 이런 모든 것과 그에 대립하는 것들은 실제로는 대립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것이 저 끝에 가면 죽음이고, 죽음이면 또다시 살아납니다. 생사가 그때는 크게 배운 자에게는 진리다, 비진리다, 선이다, 악이다가 무의미한 것입니다. 세상을 다 포용해 버립니다. 미운 자도 없고, 기쁘고 반가운 자도 없습니다. 안 반가운 자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가 그에게는 낙원입니다.

주관과 객관을 따지고 주체와 객체를 따지는 것은 공부하는 시절의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에 올라가 버리면 주객이 전도됩니다. 그 사람도 나라에서 볼 때는 그 빌딩입니다. 소유는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세금을 내야 합니다. 알고 보면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세금 내라고, 또 집세 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러워하지만, 부러워할 것 없습니다. 그 사람은 또 국가에 세금을 받아 세금을 내야 합니다. 주객이 계속 전도되는 것입니다. 주인도 객이고, 객도 주인입니다. 결국 선도 악을 위해 존재하고 악도 선을 위해 한바탕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는 유서는 ‘어머, 사람 안 죽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악이 있어줘야 선이 유지가 됩니다. 미운 사람이 없으면 예쁜 사람도 없습니다. 못생긴 여자가 있으면 예쁜 여자가 나타나게 됩니다. ‘저렇게 못생겼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저런 여자가 있음으로써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만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전생에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구나, 그래서 그런 대우를 받게 해 놓았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 아름답지 않은 여자, 저 여자는 전생에 아름다웠고 팔자 좋은 시대를 겪었고, 남에게 안 예쁜 소리를 많이 했구나, 사람들이 보면 징그럽다고 할 정도로 얼굴을 가지고 왔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 평등한 것입니다. 잘난 여자가 있고 못난 여자가 있는데, 알고 보면 평등한 것입니다. 그 시대만 보면 안 됩니다. ‘왜 죽으면 잘났고, 이건 왜 못났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왜 이건희는 부자고 우리는 거지야’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거지로서 부자로 살았기 때문에 거지가 된 것입니다. 윤회하는 때가 교차되고 있는 것뿐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이, 아름다운 여자도 없고, 여러분이 못생긴 여자도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그 사람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불변의 진리와 보편적 진리: 종교와 정치의 역할

진리라는 것은 사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영원한 진리가 있고, 변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변하는 진리는 보편적 진리이고, 영원한 진리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늘이 섬기고, 이 세상에서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불변의 진리입니다. 바꿀 수 있습니까? 숙명적인 것은 불변입니다. 내가 김씨로 태어났는데 박씨로 성을 바꾸더라도 김씨입니다. 불변의 진리가 이 세상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 진리로만 세상을 보면 또 안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종교인들은 불변의 진리를 주장하고 있고, 정치인들은 변화하는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은 그 중간에 있습니다. 불변의 진리, 살아있는 것들은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천국 가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로 가려고 하는 것이며, 인간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정화조를 치워야 하고, 쓰레기차가 있어야 하고, 소각장이 있어야 하고, 발전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천국 환경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종교인처럼 절대적 진리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자연 파괴하면 안 돼, 발전소 만들면 안 돼’라고 정치인이 말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왜 파괴하냐’는 식으로 나옵니다. 불변의 진리를 내세우는 정치 세력이 어울려서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처럼 신의 마음은 다 지켜본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나니까 이렇게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나는 서민도 잘 알아듣게 해주고, 교수도 잘 알아듣게 해주고, 말을 할 때 다양한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해줍니다. 실제 어려운 용어를 쓰는 것 같고, 한문을 쓰는 것 같지만 모든 사람이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교수들이 하는 말은 무슨 귀신이 나를 까먹는 소리처럼 재미가 없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인은 여러분들이 어떤 차원에 있든 알아듣게끔 말을 해줍니다. 예를 많이 들어서 설명합니다.

에펠탑 비유: 시대의 변화와 중도의 지혜

프랑스가 에펠탑을 만들 때 프랑스 국민 99%가 반대했습니다. ‘어디에 송전탑을 도시 한가운데 세우냐’며 난리가 났습니다. 송전탑이라고 불렀습니다. 끝까지 그런 국민들이 송전탑을 파리 한가운데 세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최고의 명물입니다. 프랑스는 에펠탑으로 먹고 삽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프랑스 국민들은 왜 그것을 송전탑이라고 부르며 데모를 했을까요?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는 사람은 도망갔습니다.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당시에는 그것이 대중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지금 대중들의 마음은 마음이 아닙니까? 그때만 진리였습니까? 지금 대중들의 마음은 또 에펠탑을 사랑합니다.

그 당시 국민들의 민도와 지금의 민도를 비교해 봅시다. 지금은 에펠탑 때문에 먹고 삽니다. 똑같지 않습니까? 이상하고 그랬다니까요. 데모하고 이러니까, 이 디자인을 한 사람이 무지하게 고생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 사람 말이 맞습니다. 역사 시대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 신이 혼동을 가지면 안 됩니다. 인간들은 종교가 내세우는 변하지 않는 진리와 정치가 내세우는 변하는 진리 사이에 존재하면서 종교로 갔다가 정치로 갔다가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은 이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그때는 상투를 지키느라고 목숨을 걸었습니다. 단발령이 내리자 목숨을 끊고 상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고종 황제에게 대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일본이 단발령을 잘 내린 것입니다. 모두 상투를 꽂고 있으면 이 꼴이 되고 무엇이 되겠습니까? 지금 경제 개발도 못 하는 것입니다. 머리 때문에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객관의 진리는 수시로 바뀝니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는 바뀌는 일이 없습니다.

중도적 시야: 대인배의 지혜

신인이 와서 여러분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여러분을 심판해 주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잘 되었습니다. 나는 한번 붙들리면 이야기하지 않으면 못 합니다. 여러분은 사물을 볼 때 어떤 절대적인 것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아, 저건 안 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어머, 저것도 에펠탑처럼 나중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저것을 보기 싫어하지만, 나중에는 에펠탑처럼 우리 마음이 저쪽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중도를 지켜야 합니다. 너무 좋다, 나쁘다에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나중에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에펠탑 반대 취재 위원장을 했던 사람이 그런 생각을 했으면, ‘어머, 이게 나중에는 또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내가 왜 여기에 사로잡히지, 내가 왜 이러지, 저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차원이 달라져야 합니다.

아내가 그 옷을 꼭 입겠다고 하면 ‘야, 그게 요즘 사람들이 보는데 그게 뭐냐’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새로움을 주장해도 ‘그래, 안 그래’라고 해야 하는데, 그냥 아내에게 ‘당신 그게 옷이에요?’ 이런 사고를 하면 남자는 항상 여유를 갖고 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중도입니다. 어떤 진리에 매몰되지 마십시오. 진리도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봐주는 것입니다. ‘뭐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중관자 입장에서 일본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닌 중간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야가 필요합니다. 내가 일본이었다면 독도를 우리 것으로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섬에서 사는 사람들이니까 섬 하나라도 더 찾아가려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웃으면서 바라봐야 합니다. ‘줄 수도 있겠다, 그러면 그것보다 선보다 일본 사람과 우리가 친구가 더 우선 아니냐, 인간관계가, 그 물질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런 개념으로 일본 사람하고 친해지다 보면 서로 ‘독도는 네 거야’, ‘그러면 한국 거예요’ 이런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뭔가를 가지고 너무 첨예하게 대립하면 나중에 후회합니다. 소인배와 대인배는 다릅니다. 이래도 저래도 다 일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