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 욕구와 존재의 단계
인간의 욕구는 본능적인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본능적 욕구에 충실하면 동물과 같고, 자아실현의 욕구로 나아가면 진정한 사람에 가까워집니다. 동물과 사람 사이의 존재를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부모에게 “제발 사람 좀 되라”는 꾸중을 듣는 존재입니다. 부모나 친구, 사회에 기대어 살아가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기에, 부모는 자식에게 “인간을 버리고 사람 좀 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욕구의 단계를 이해하라는 의미입니다.
옛 어른들은 “인간아, 사람 좀 되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불교의 육도(六道)에서 가장 밑바닥은 지옥이며, 그 위로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사람, 천인(천상)의 순서로 존재합니다. 인간은 수라와 사람 사이에 위치하며, 아직 덜 성숙한 존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인간은 사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신의, 효도, 애정, 교육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 부부간의 애정, 자식에 대한 교육이 바로 그것입니다.
욕구의 두 얼굴: 탐욕과 득
욕구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욕구가 남을 위한 것이면 ‘득(得)’이 되고, 자신을 위한 것이면 ‘탐욕(貪慾)’이 됩니다. 독사가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뱀이 물을 마시면 약이 되듯이, 욕구 또한 누구를 향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자신을 위한 모든 욕구는 탐진치(貪瞋癡)에 해당하며 죄악이 됩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심은 복이 되고 득이 되어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공부를 해서 좋은 차를 사고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고, 좋은 변호사나 판사가 되어 부모에게 효도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이자 탐진치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공부해 훌륭한 정치인이 되어 세계를 바꾸고 통일하며, 어려운 사람들의 대변인이 되어 불평등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구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욕구가 성화된 것입니다. 욕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며,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이기적인 욕구는 끝이 좋지 않지만, 이타적인 욕구는 그 끝이 좋고 모든 것을 잘 구성합니다.
이타적 삶과 그 결과
돈을 떼먹은 사람과 돈을 빌려주었다가 떼인 사람을 비교해 봅시다. 돈을 떼먹은 사람은 숨어 다니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암에 걸리는 등 비참한 결과를 맞이합니다. 반면 돈을 떼인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손해를 본 것처럼 보이지만, 하늘에서는 그 희생을 인정해 줍니다. 통장에 돈을 넣어두고 죽는 것은 아무 복도 아니며, 자식이 그 돈을 쓰는 것도 복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에게 돈을 베풀고 죽으면 다음 생에 그 복이 돌아옵니다.
전생에 남에게 박해를 많이 받고 이기적이지 않은 이타적인 삶을 살며 고생한 사람은 현생에서 사람들이 그를 돕고 싶어 합니다. 반대로 전생에 재미를 많이 누린 사람은 현생에서 인기가 없습니다. 복이 들어왔을 때, “이것은 내 복이니 당연히 내 것”이라며 이기적으로 취하면 그 집안은 망합니다. 이타적으로 살아 좋은 환경에 태어났더라도, 그 환경을 다시 이타적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도의 세계로 올라가야 하며, 나를 만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극기복례: 진정한 욕구의 완성
이기적인 욕구는 끝이 좋지 않지만, 이타적인 욕구는 그 자체가 복이 되어 모두가 잘 살고 돌아갈 때도 떳떳합니다. 제사상 걱정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남들이 잘 죽는 것을 걱정할 뿐, 자신의 죽음은 이미 자신을 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욕구이자 ‘극기복례(克己復禮)’입니다.
극기복례는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기느냐 하면, 자신의 욕구를 이기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목사가 되겠다고 한 사람이 부자가 되려고 하거나, 사법고시를 봐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러나 신학대학에 가서 남에게 봉사하겠다고 하는 학생은 이미 이 땅에 대한 애착을 버린 것입니다. 가난한 목사가 되어 영원히 봉사하겠다는 마음은 자신을 이긴 ‘극기’의 실천입니다.
성직자와 대통령의 욕구 극복
이 땅의 땅따먹기나 돈벌이에 관심을 두지 않는 신학생처럼, 성직자들은 목표를 땅에 두지 않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데 둡니다. 교회 돈이 자신의 것이 아니듯, 그들은 이미 자신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종교의 진위 여부를 떠나, 성직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종교를 가르치거나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이미 이 땅에 대한 욕심을 버린 것입니다.
욕구에는 레벨이 있습니다. 성직자들처럼 세상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 또한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땅따먹기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국민이 잘 살기를 바라며 나중에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합니다. 국민에게 도둑놈으로 대우받고 싶어 하는 대통령은 없습니다.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의 욕구를 극복한 자들입니다. 대통령을 욕하는 사람은 잘 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들의 착한 뜻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좌파든 우파든, 그들은 개인적인 욕심을 버린 자들이기에 뽑힐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경쟁하면서도 여야 대통령을 항상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욕심을 버린 자들이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아까워 몇 백억이 들어가는 선거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는 한 달에 1억 이상을 매월 무료 급식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종로 2가에서 45년째 무료 급식을 하고 있으며, 월 1억 3천만 원의 현찰이 들어갑니다. 앞으로 돈이 많아지면 한 달에 10억 이상을 할 것입니다. 내가 내는 무료 급식 비용은 우리나라 최고 소득자들이 1년 연봉과 맞먹습니다. 나는 1년에 세금도 60억 정도 내고, 지방세 10억, 의료보험료 6천만 원을 냅니다. 개인 소득으로는 국내 최상위에 속합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을 이긴 자들은 욕구 자체가 남을 위한 것입니다. 극기복례를 통해 자신을 이기면서 남의 예를 세워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욕구의 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