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 사회의 도래와 인간 소통의 변화
오늘날 우리는 대면 접촉이 사라지는 사회에 대한 질문에 직면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물을 긷거나 생활에 필요한 곳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인간이 서로 소통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방 안에서 24시간 물과 전기가 공급되고, 과거 왕만이 누릴 수 있던 음식을 누구나 배달시켜 먹으며,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등 모든 불편함을 방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MG세대는 이러한 비대면 문화에 익숙해져 대인공포증으로 전화 통화조차 어려워하고, 사람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취업 면접이나 연애, 결혼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대면 없는 사회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과거처럼 인간이 서로 매개체가 되는 사회는 다시 올 수 없는 것인지, 언어도단(言語道斷) 이후의 시대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습니다.
하극상 시대: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의 갈등
지금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자식들이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 시대입니다. 모든 청년이 기성세대에게 반항하고, 기성세대는 안정을 추구합니다. 반면 청년들은 희망과 신체적인 모험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청년들의 발목을 잡고 있고, 청년들은 발악하는 형국입니다.
지금 세상은 하극상 시대, 즉 역성혁명(易姓革命) 시대와 같습니다. 프랑스 농민들이 왕을 끌어내려 단두대에 세우고 농민들이 재판관이 되었던 것처럼, 아랫사람들이 기존 질서를 뒤엎는 역성 시대입니다. 학교에서도 학생이 선생을 지배하는 말세에는 신인이 나타납니다. 신인의 능력은 불가사의하여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신인의 능력: 언어도단과 비사량처
신인이 가져온 능력은 말과 글로 쓸 수 없습니다. 이는 사량분별(思量分別)로는 알 수 없는, 생각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온 자가 바로 말세에 온 나입니다. 여러분은 사량분별로 사물을 보지만, 사량분별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가져온 자가 왔습니다.
언어도단은 해인(海印)이 되고, 회의 시대에는 신인석판(神人石版)이 나타납니다. 이는 일종의 해인 시대에 다양성을 가지고 비사량처(非思量處)에 도달하며, 식정난척(識情難測)의 경지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계입니다. 말이나 글로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즉 비사량적 삼각산자(非思量寂 三覺山者)의 세계입니다.
인간이 사량할 수 없는 세계, 즉 비사량처이며, 일반적으로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세계, 실증 지식이나 정보로는 측량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사량으로는 갈 수 없는 세계, 글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계에 내가 온 것입니다. 이 말세는 인간들이 해결할 수 없는 시대이며,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움직이는 시대입니다. 내가 비행접시를 타고 올라가는 것을 사량분별로는 알 수 없습니다. 비사량적 분별이 없으면 볼 수 없는 세계입니다.
말세의 서곡: 니체, 프로이트, 사르트르
옛날 니체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목사였던 때부터 말세의 서곡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트도 마찬가지로 강박증을 중요시하고 성적 욕구가 자율적으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사르트르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며 죽음을 두려워해서 믿는다고 말하며,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고 세상에 두려운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누구나 남성도 여성이 될 수 있고 여성도 남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중세 유럽의 교회들은 껍데기만 남고 결혼식 때만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종교로서 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의 인간들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윤리와 법, 그리고 영성
과거에는 인간을 매개체로 소통했으며, 그때는 사단(四端)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습니다. 양반들은 사단을 지켰고, 천민들은 실증을 지켰기에 사회가 잘 돌아갔습니다. 지금의 윤리는 무리 윤(倫) 자를 쓰듯이 무리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따라서 윤리는 인간 무리들이 바꿀 수도 있습니다. 높은 도리가 하늘의 도리가 되고 인간의 도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거 사람들이 부딪히면서 만들어졌던 윤리가 있었다면, 지금은 부딪힐 일이 많지 않으므로 그때와 다른 윤리가 자리 잡아야 합니다. 이제 영성 도리도 지났습니다. 도리는 무리들이 그 당시 뭉쳐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몇 살에 결혼시키자”, “자녀와 부모의 도리” 같은 삼강오륜이 바로 윤리입니다. 이것은 법이 아닙니다. 그 윤리 위에 또 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맨 위에는 영성이 있습니다. 영성이 지켜지지 않으니 윤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언어도단 시대부터는 영성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마음의 열을 내리는 방법과 중용의 오해
사람들이 마음의 열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성적인 충동을 해결하지 못하면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선생들에게 체벌권을 주어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까지는 선생님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선생이 학생들의 의사를 거절할 수 있고, 선생의 권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용(中庸)에 대한 질문입니다. 공자도 중용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저는 중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눌 때, 사람이 너무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미래 계획에만 치중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수준 높은 사람들은 현실에 집중하는 현실주의자라고 느낍니다. 신인님이나 마이클 조던 같은 위대한 업적을 세운 사람들도 극한의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주의자가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실, 즉 중간에 있는 중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중용의 진정한 의미와 신인의 경지
현재 중용은 중도(中道)라고 봅니다. 축령지도(祝靈之道)나 중도지도가 도의 세계보다 앞선 모든 것이 무너지니 중용과 중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사의, 무불통지(無不通知), 언어도단, 비사량처, 식정난척, 불이문자(不二文字) 같은 경지는 인간의 과학이나 중도, 중용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고, 오직 나만이 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누가 사량분별로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박근혜 대통령이 언제 쫓겨날 것이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분별심이나 사량심으로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비사량처에서 나오는 신의 말입니다. 2000년 후에는 속초 앞바다가 LA와 붙어버린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밖에 모릅니다. 나는 모든 일을 지식이나 정보로 측량할 수 없는 세계를 이야기해 줍니다.
중도는 중용으로써 알 수 있는 선과 악의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나 중용을 “선과 악의 중간을 택하면 되는가 보다”라고 잘못 알면 안 됩니다. 중도도 없고 중용도 없습니다. 의(義)를 지키지 않으면 악입니다. 의롭지 못하면 악의 무리들은 의로써 처단해야 합니다. 의가 없으면 악이고, 악의 반대는 정의입니다.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정해놓지 못한 자는 악입니다.
선(善)은 예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법을 지켜 사는 것입니다. 예를 어기는 자는 선이 아닙니다. 예를 지키면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보다 의가 더 살벌합니다. 예를 지키는 자와 의를 지키는 자의 중도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예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지만, 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운 자는 선한 자와 다릅니다. 선한 자는 예에 속하지만, 악은 의에 속합니다. 이 두 가지에는 중도가 없습니다. 중용도 없습니다. 중도와 중용을 잘못 알면 안 됩니다.
중용과 중도의 올바른 이해
중용이나 중도는 모두 도(道)입니다. 중용지도, 중도지도이지, 중용지위가 아닙니다. 일본군이 쳐들어왔는데 전쟁으로 가지 않고 “나는 중도를 지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중용과 중도는 우리의 일반적인 선악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중용과 중도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에 적용되지만, 선악에는 중용과 중도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조건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적당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일본군이 쳐들어와 부모를 죽이는데 중도를 지키는 것은 안 됩니다.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정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화랑도에서는 전쟁할 때 살생은 어쩔 수 없으며, 살생을 하더라도 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과거 선조들의 지혜는 지금의 법보다 차원이 높습니다.
윤리, 법, 그리고 하늘의 섭리
우리가 공동으로 만드는 것이 윤리입니다. 법을 만들기 전에 윤리를 만들었고, 그 윤리가 바로 선(善)입니다. 윤리를 넘어서는 자, 윤리에서 중도를 벗어나는 자, 윤리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 법이 적용됩니다. 그물을 쳤는데 빠져나오는 고기를 잡는 것이 법입니다. 그물이 바로 윤리입니다. 무리 윤(倫) 자는 무리들이 약속하여 만들어 놓은 집단입니다. 삼강오륜을 지키지 않는다고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리들끼리 약속한 것이며, 이것이 최초의 약속, 즉 윤리 도덕입니다.
도덕은 윤리입니다. 그런 도를 지킨 자는 덕을 받습니다. 그러나 덕이 오느냐, 형벌이 오느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윤리를 안 지키면 형벌이 따릅니다. 윤리 도덕은 법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윤리 도덕을 어기면 법이 개입합니다. 철학은 매우 복잡합니다. 개념 자체를 확실히 아는 사람만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중용과 중도를 혼동합니다.
윤리를 지키면 중도입니까? 윤리를 지키면 법에 가지 않습니까? 윤리를 벗어나면 법이 나타납니다. 법을 어기면 하늘이 나타납니다. 인정을 어기면 자연의 이치가 나타나고, 이치를 어기면 이치가 윤리입니다. 비정리를 어기면 법이 나타나고, 법을 어기면 권력이 나타납니다. 권력을 잡는 것은 하늘입니다. 용감한 장군은 지혜로운 장군을 이기지 못하고, 지혜로운 장군은 덕 있는 장군을 이기지 못합니다. 덕 있는 장군은 권력이 있는 장군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무리 덕이 있는 장군이라도 운을 이기지 못합니다. 비정리 덕운천(非定理 德運天), 비용지(非用智)입니다.
결국 권력이 마무리하다가 안 되면 하늘이 마무리합니다. 그 앞에는 법이 있습니다. 법을 어기면 권력이 나타나고, 권력을 어기면 하늘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용이나 중도는 함부로 쓸 수 없습니다. 소유욕에 대해서는 중도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적당히 소유하고 투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용과 중도는 많은 공부를 해야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세에는 예(禮), 즉 선과 악을 지키는 자도 드물고 악을 하지 않는 자도 드뭅니다. 말세의 특징은 불가사의 문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