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The Essence of Human Desires Evolving to Higher Dimensions: From Instinctive Needs to Compassionate Self-Sacrifice – January 15, 2025

인간 욕구의 본질과 자연의 생존 방식

인간을 움직이는 핵심 원동력인 욕구는 단순히 마음이나 심리의 일종인지, 그 본질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궁(하늘)의 욕구는 지구의 욕구와 어떻게 다른지도 궁금합니다. 인간의 욕구는 자연의 생존 방식인 약육강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스스로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작은 나무는 큰 나무를 겨냥하여 햇빛을 받으려 하고,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수십 년이 지나면 다른 수종은 사라지고 엉뚱한 수종이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자연이 생존 경쟁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에는 아까시나무 밭이었지만, 다람쥐가 심은 참나무가 자라 참나무 밭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아까시나무는 높이 올라가지 못해 탄소 광합성을 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을 식물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태양을 봐야 한다는 것이 식물의 최종 생존 경쟁입니다. 옆 나무가 살든 말든 서로 태양을 봐야 하고, 위로 올라서려 합니다. 그 결과 나무들은 길게 자라게 됩니다. 이는 나무들이 우리에게 말은 하지 않아도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약육강식과 먹이 사슬의 질서

자연의 존재 방식인 약육강식은 약한 것이 강한 것의 먹이가 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석가모니가 처음 목격한 것도 이러한 약육강식의 현장이었습니다. 농부가 밭을 갈자 까마귀가 벌레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석가모니는 놀랐습니다. 까마귀가 벌레를 잡아먹지 못하게 하면 까마귀는 굶어 죽게 됩니다. 그렇다고 벌레를 살려주는 것이 살생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농부의 입장에서 보면 밭을 갈아엎어야 먹고살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벌레들이 까마귀의 먹이가 됩니다. 석가모니는 이 지점에서 크게 방황했습니다. 농부도 먹고살아야 하고, 벌레도 땅속에서 먹고살아야 하며, 까마귀도 벌레를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누구를 막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석가모니는 인생이 고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보면 창조자의 질서, 즉 먹이 사슬이 존재합니다. 모기는 개구리의 먹이가 되고, 개구리는 뱀의 먹이가 되며, 뱀은 산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이렇게 먹이 사슬이 착착 올라가 호랑이까지 이어지는 오차 없는 질서가 있습니다. 이 중간을 끊어버리면 안 됩니다. 모든 동물은 약한 것을 먹으면서 존재하며, 강한 동물의 숫자는 갈수록 적어지고, 밑으로 내려갈수록 숫자가 많아지도록 보존되어 있습니다. 사자 숫자는 적고, 개구리 숫자는 더 많으며, 뱀 숫자는 개구리보다 적어야 합니다. 뱀이 개구리보다 많으면 모두 죽게 됩니다. 이렇게 순서가 정해져 있는 메커니즘이 생명입니다. 아무리 잡아먹어도 그 종자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또한 잡아먹히는 과정에도 유전 법칙이 적용되어, 같은 뱀이라도 깨가 많은 뱀은 짐승에게 잡혀 먹히지 않습니다. 뭔가 더티한 놈만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먹이 사슬에 꼭 걸려드는 놈이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뱀의 숫자, 개구리 숫자, 모기 숫자는 내려갈수록 많아지며, 레벨도 딱 맞춰져 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이 먹어봐야 밑에 있는 것이 항상 존재합니다. 모기 약을 뿌리지 않으면 모기는 항상 존재합니다.

인간 사회의 생존 경쟁과 공존 공영의 원리

인간 세계에도 먹이 사슬이 존재합니다. 만약 모두가 농약을 뿌리는데, 자기 사과밭에만 농약을 뿌리지 않고 키우겠다고 하면, 온 동네 벌레들이 그 사과밭으로 다 모여들어 나무가 말라 비틀어져 죽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그렇게 되어갈 때 따라가지 않으면 살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며, 생존 경쟁은 이렇게 무시무시합니다. 같이 농약을 뿌릴 때는 비슷하게 뿌려줘야 합니다. 나는 농약 뿌린 곡식을 남에게 주지도 않고 먹지도 않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죽어야 합니다. 이 생존 경쟁에서는 정의만 지킨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의를 지키지 않는 존재들이 들판을 다 차지해 버리기 때문에, 혼자만 농약을 안 뿌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 논에서 농약 뿌린 물이 이 논으로 들어오면 농약을 안 뿌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독자적으로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약육강식이라는 서열도, 생존 공생의 법칙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공존 공영해야 합니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야 하며,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쌀 하나를 먹어도 수천 명의 손을 거쳐 집에 배달됩니다. 엄청난 메커니즘을 거쳐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옵니다. 파뿌리 하나, 계란 하나도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온 것입니다.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옛날 같으면 닭 한 마리 키워서 알을 먹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온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우리는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생존 경쟁은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이것을 압니다. 동물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약한 것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주가 많아 혼자 몇백 년 먹을 것을 쌓아 놓을 수도 있고, 숨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인간에게는 공존 공영, 다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법칙이 필요합니다.

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공산주의의 실패

칼 마르크스는 독일 훔볼트 대학 정문에 비석이 서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의 비석에는 “지금까지의 철학은 그 철학을 읽었을 뿐이다. 앞으로의 철학은 그 철학을 실행하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철학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독교에 대입하면, 지금까지의 종교는 경전을 읽는 데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주장하며 낙원을 꿈꿨지만, 실제로는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공산주의는 붕괴하고, 사람들은 못 살아서 자본주의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의 이론은 현실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종교는 경전을 읽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경전을 직접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직접 와 버리니 경전이 필요 없습니다. 면허 시험에 붙은 사람이 면허증을 볼 필요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공존 공영으로 통제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탐욕의 구분

인간에게는 탐진치(탐욕, 진심, 치심)가 있습니다. 물욕, 식욕, 색욕, 명예욕, 수면욕의 다섯 가지가 기본 욕구입니다. 이 욕(欲)자에는 마음 심(心)자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마음속에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며, 마음 심자가 붙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이며, 누구도 없앨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탐욕(貪欲)은 마음 심자가 붙지 않습니다. 탐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며, 본능이 아닙니다. 슈바이처 같은 사람들은 탐욕 자체가 없을 수 있습니다. 탐욕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는 이러한 인간의 오욕을 분류한 것입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 재물욕, 색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수면욕도 잠을 자야 건강이 안전하므로 안전에 대한 욕구에 들어갑니다. 이러한 욕구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러나 자동차 욕심처럼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욕구도 있습니다. 좋은 차를 한번 가져본 사람은 미련이 별로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시시한 차라고 생각하거나,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여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한번 된통 당해보면 욕구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욕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닙니다. 명예에 대한 욕구는 천국 욕구도 포함합니다. 잘 살았는데 천국에 못 가면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의 원리: 자비희사

약육강식은 본능적인 것이며, 생존 경쟁은 식물의 생존 방식입니다. 공존 공영은 인간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하늘의 원리는 자비희사(慈悲喜捨)입니다. 이는 남의 어려움을 베풀고, 남이 잘되도록 베풀며, 자신은 희생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줌으로써 기쁜 것이 천국 2단계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처럼 다 같이 가져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못 누려도 좋으니 당신들은 누리라는 단계가 천국입니다. 이는 욕망이 끝난 세계입니다.

윌리엄 보든의 유언: 희생과 헌신의 삶

미국인 청년 윌리엄 보든은 25살에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죽었습니다. 그는 재벌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상속을 거부하고 중국에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성경 안에 유언을 써 놓았습니다. 세 가지 “노(No)”였습니다. 첫째, “노 리버스(No Reserves)”, 즉 남김없이 모든 재산을 불우한 재단에 기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노 리트리트(No Retreats)”, 즉 후퇴 없이 절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교사로 일평생을 마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노 리그레츠(No Regrets)”, 즉 후회 없이 예수님을 전도하는 전도사로 인생을 끝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유품을 챙기다가 이 유언을 보고 통곡하며 아들을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망이 없었지만, 인간이 잘 살게 하겠다는 욕망, 즉 신에게 전도사로서 사명을 다하겠다는 욕망은 있었습니다. 이러한 청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미국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하버드 대학 같은 곳에서 나온 인재들 중에는 자기 전 재산을 남김없이 기부하는 대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윌리엄 보든은 풍토병으로 죽었지만, 그의 유언은 성경 맨 앞장에 붙여져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는 천국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욕구의 두 가지 종류: 본능적 욕구와 희망적 욕구

욕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 내면에 있는 욕구로, 마음 심자가 붙어 있는 본능적인 욕구입니다.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이 이에 해당하며, 누구도 없앨 수 없고 죽을 때까지 따라다닙니다. 둘째, 탐욕과 같이 마음 심자가 붙지 않는 욕구입니다. 이는 희망이나 꿈과 같은 욕구입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겠다는 욕구, 효자가 되겠다는 욕구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욕구는 본능이 아니며,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습니다. 좋은 집을 샀다가 나중에는 시골에 가서 살고 싶어 아파트를 팔아버리는 것처럼 욕심이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병이 나았으면 좋겠다는 욕구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나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욕구는 훈련에 의해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식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과 같은 본능적인 욕구는 줄일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 따라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