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의 본질: 감각을 넘어선 삶의 리듬
오늘은 ‘재미’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강연 중에 항상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합니다. 사전적으로 재미는 ‘아기자기하고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 좋은 성과나 보람’ 등으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단순한 사전적 의미와 달리 인간의 삶에서 깊고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 안에는 더 심오한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재미의 정체는 무엇이며, 항상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가 궁금할 것입니다.
재미는 우리가 사랑하는 희로애락 중 ‘희(喜)’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는 감각적인 재미에 불과합니다. 제가 말하는 재미는 사실 ‘리듬’을 의미합니다. 웃어가면서 강의를 들으면 유머러스하게 느껴지지만, 서양 사람들은 유머가 주입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유’입니다. 인간들이 너무 경직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백’과 ‘여유’입니다. 이러한 여유는 사람의 삶에 엄청난 즐거움을 줍니다. 나물 먹고 물 마시더라도 옛 선배들이 가졌던 그 여유,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재미입니다.
강의 중에도 흘러간 이야기도 하고, 타임머신을 타고 고려 시대로 돌아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하면서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이 재미입니다. 딱딱하게 학교에서 강의를 듣는 것은 재미가 없습니다. 선생들도 재미있게 가르쳐야 합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인도로 갔다가 남극으로 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학생들이 수학 공부를 하면서도 “아, 이건 남극이야. 여기는 온대지방이네, 코리아야” 또는 “XY는 이 수학 문제는 아주 남극이네, 되게 어렵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유와 여백이 없는 삶은 밥 먹고 개미 세 바퀴 도는 것처럼 재미가 없는 삶입니다.
여유와 여백이 만드는 진정한 재미
재미가 있는 사람은 여유와 여백이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다른 사람에게 좀 뒤처지더라도 ‘만만디’하며 여유 있게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쫓기면서 갔다고 해서 빨리 간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너무 희로애락에 휩싸입니다. 기쁜 것과 슬픈 것, 노하는 것을 겪고 나아야 여유가 생기고 즐거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즐거움은 항상 맨 뒤에 있습니다. 기쁜 것은 감각적인 것이지만, 재미는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낙(樂)’입니다.
“재미가 있어야 사람이 살지”라는 말은 쉬운 말 같지만 어려운 말입니다. 인생의 재미는 나물 먹고 물 마셔도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푸시킨의 시처럼, 그 자체가 재미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면 푸시킨은 그 시를 그렇게 썼습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한 것은 재미를 찾으라는 의미입니다.
푸시킨의 시: 고통 속에서 찾는 그리움과 재미
푸시킨의 시는 유명합니다. 재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것은 희로애락 중 슬픔과 노여움을 빼면 무엇이 남느냐는 것입니다. 그 시가 말하는 것은 재미입니다. 지나간 것은 그리운 것이고, 다가오는 것은 공포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며, 푸시킨의 시는 아주 철학적입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예사로 보면 안 됩니다.
그 시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현재는 언제나 한없이 우울해. 그러나 지나고 보면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간 것 그리움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지나간 것은 그리움이 됩니다. 이 자체의 노여움이나 슬픔을 재미로 보라는 말입니다. 재미로 보라는 것입니다. 지나고 나면 이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어버립니다. 정반합처럼 재미가 되는 것입니다. 슬픈 것도 기쁜 것도 그리운 시절이 됩니다. 그것이 재미인데, 우리는 재미 속에 있으면서도 재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통해 깨닫는 삶의 진정한 의미
그것을 알면 인생이 다시 보입니다. 고통이, 아, 이것이 보통의 고통이 아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내가 지금 고시방에서 라면 끓여 먹고 하는 이것이 내가 나중에 CEO가 되어 세계적인 재벌이 되었을 때, 이것이 처음이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옛날 내 학생 시절에 나물 먹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가 그립다. 차라리 지금 내가 이렇게 부귀영화를 누리면 뭐 하니? 그때가 없었다면 내가 이게 뭐야?”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삶이고 재미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즐거움이 없습니다. 즐거움이 없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 이것이 상대적으로 밤낮이 있는 것처럼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재미있게 보아야 합니다. 팔이 잘리고 하는 것을 계속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본 영화를 재미있게 보는 마지막에 이기는 것만 보여줍니다. 이런 인생을 우리가 원하는 그런 재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마술을 머리 박는 것처럼 이런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영화구나” 이러면서 머리 박아야 합니다. 안 받고 대들면 안 됩니다. “이것도 인생이구나, 소설 쓰고 있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희로애락이 만드는 인생의 클라이맥스
영화를 볼 때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만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누가 모형을 보겠습니까? 쫓기고 고문받고 도망가는 장면을 제3자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 영화가 재미로 보입니다. 그런데 재미없는 고문받는 장면을 다 빼고 클라이맥스만 1분짜리 딱 보여주면 그 영화는 아무도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재미 자체가 없어져 버립니다. 인생의 재미는 무엇입니까? 희로애락이 다 재미입니다. 이제 재미라는 입장을 이해할 것입니다. “왜 나에게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재미입니다. 고통의 시절이 있고 참고 가다 보면 그것이 그리워지는 때가 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가 고시방에서 정말 책과 씨름하며 맨밥 먹어가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밥도 이제 고구마 하나 먹고 하면서, 밥하는 데 시간 낭비하면 사법고시에 떨어집니다. 그냥 먹으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승리하면 좋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떨어져서 좌절되면 파탄의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맨밥을 먹으면서 시간 절약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절이 있어야 고된 검사, 판사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과거의 고난을 기억하며 현재를 경계하라
“그때가 내가 이게 뭐냐. 그때는 맨밥 먹고 공부했는데 지금은 반찬이 좋으니 나쁘니. 이거 좋은 마누라 부잣집 사위가 돼서 판사가 돼 가지고 내가 지금 입이 너무 고급이 된 거 아니냐. 나 이거 참 너무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야, 내 입이 이렇게 고급이 됐냐? 옛날에는 나물 먹으면서 맨밥 먹고 공부했는데. 내가 너무 교만해졌다. 중간중간에 그때를 내 입을 잘못 길들이고 있어. 당신은 좀 검소한 밥을 해. 내 고혈압 당뇨병 걸리면 좋아”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그 고생했던 때를 경계해 가면서 해야 합니다.
돈이 저축되는 것과 내가 고생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당신이 알뜰하게 저축하는 건 괜찮지만, 노후를 위해서 내가 너무 음식을, 우리가 너무 값비싼 것을 마음 놓고 이렇게 먹으면 안 됩니다. 좀 검소하게 생활비를 줄여야 합니다. 우리 옛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 건강도 유지하고 양심의 가책도 덜 받습니다.
고통이 주는 즐거움과 그리움
이제 재미가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월이 지나가면 그 슬퍼하고 노여워한 것이 즐거움이 되고 그리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시촌에서 맨밥 먹어가면서 시간 아끼면서 공부한 것, 반찬 챙기고 이러면 다른 아이에게 뒤처집니다. 그렇게 공부한 것이 세월이 지나서 판사가 되거나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나서 생각해보면 그것이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짜장면을 먹으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사법고시 합격하고 나서 짜장면 먹으면서도 웁니다. 왜? 그렇게 해서 판사가 되었는데, 짜장면 먹으면서 우는 것입니다. 자기 옛날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짜장면 한 그릇 시켜놓고 먹으면서 자기가 판사 노릇을 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에는 밥하지 마. 짜장면 시켜. 짜장면 가져오게” 그러면서 짜장면을 먹습니다. 재벌집 딸과 결혼해서 판사가 되었지만, 자기가 고시방에서 고생하듯이 맨밥 먹고 굶어가면서 공부하던 시절을 생각해서 한 번씩 짜장면을 시켜서 먹는 것입니다. “마누라, 당신은 왜 짜장면 자꾸 이거 봐요. 너무 반찬 하지 마. 한 번씩 옛날로 돌아가야 해. 내 입이 내 옛날을 잊어버리면 우린 불행해져.” 그렇습니다. “나는 그때가 소중해. 당신 만나기 전에, 당신 부잣집 딸 만나기 전에 내 맨밥 먹고 살았으니까 오늘 짜장면 시켜라”라고 말하며 간단하게 먹으면서 옛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멋있는 사람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성공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겸손
성공했지만 자기 동료의 50%, 70%는 망했습니다. 지금 월세도 못 내고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입은 고급이 되어 마누라가 호강하고 앉아 있습니다. “오늘은 뭐 짜장면만” 이러면서 옛날에 자기 입맛을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꾸 회상하면서 살아야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이런 것에 걸리지 않습니다. 또 고생하던 것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고시방에서 너무 고생하다가 사법고시에 떨어져서 거지가 되었는데 어머니 생신날이 되어 선물을 하나 가져가려고 편의점에서 훔쳤습니다. 야, 이것을 판사가 보니까 자기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을 봐줄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잘 나갈 때 옛날에 고생하던 사람이 잘 나가다 보면 거기에 교만해져 버립니다. 인생 망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여유라는 것, 우리의 재미라는 것은 삶의 재미라는 것은 옛날을 회상하면서 그 어려운 때를 회상하면서 항상 거기서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야, 나는 지금 때깔 걱정은 없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려운 사람들 입장을 생각하고 자기 입이 고급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고통은 미래의 즐거움을 위한 보상
현재는 언제나 고되고 힘든 것이지만, 지나가면 언제나 그리운 것입니다. 고되고 힘든 것이 세월이 지나면 이것이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고통이 와도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내 훗날의 재미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 재미에 대한 주제는 충분히 우리가 재밌는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전쟁통에 자기 애인을 그리워하는데 친구들이 막 죽어나갑니다. 그 속에서도 자기 애인 편지가 오면 전쟁터에서 그 기쁨을 누립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오버 다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독일 히틀러 전쟁 때 미군 병사가 다리에서 자기 애인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한오버 스토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그 병사가 계속 죽음의 위협을 겪고 애인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한오버 다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한오버 다리에서 만나자는 약속입니다. 전쟁이 끝날지 모르니까 전쟁이 끝나면 한오버 다리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 여자와 이별했습니다. 커피숍이 있었나 봅니다. 당시 전쟁 때 그 여자와 마지막 헤어지면서 한 말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자기는 살았습니다. 친구는 다 죽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한오버 다리에서 그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고통 없는 클라이맥스는 없다
남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만나러 다리에 갈 때까지가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재미로 봅니다. 그거 다 빼버리고 한오버 다리에서 만나는 것만 딱 있으면 재밌겠습니까? 재미없습니다. 아무 재미가 없습니다. 헤어지고 그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서로 그 여자를 그리워하면서 편지 주고받으면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 그런 장면이 있어줘야 합니다. “야, 이건 다 빼버려” 이러면 되겠습니까? “야, 이건 고통이니까 빼 버려” 이러면 되겠습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99%가 클라이맥스입니다. 아슬아슬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유관순 열사가 고통받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 한오버 다리에서 그 여자가 나타납니다. 그럼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99%의 지난날에 그 기다리던 시절, 전쟁터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있는 그것을 우리는 보고 재밌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 가닥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주인공이니까 안 죽을 거야” 요것만 믿고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 고통 속에 있습니다. 계속 그 남자는 목숨이 아슬아슬하고, 그 여자는 다른 남자가 막 데이트를 청하고 이런 것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남자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모릅니다. 이런 소리를 계속 가지고 가는데, 이것이 인생의 고통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고통이 고통입니까? 아닙니다. 언젠가 다가올 그 행복에 대해서 보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쌓여서 나중에 행복을 느낄 수 있고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생의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완성되는 인생의 대작
그래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자는 망합니다. 고통을 계속 밟고 가야 합니다. 왜 그 영화가 막판에 가서 좋아집니까? 좋은 것입니다. 중간에 계속 좋은 것만 있으면 영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대작들은 끝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 “아이고, 나 이거 재수 없어. 내가 왜 이리 실업자야?” 이러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나의 목적은 저 끄트머리에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영화의 초반부입니다. 벤허의 초반부입니다. 나중에는 자기 엄마도, 자기 동생도, 누나도 나병도 없어지고 얼마나 좋아집니까? 그냥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참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다 빼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 고생할 거 싹 없애 주세요” 이러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얼마든지 다르게 받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림을 보듯이, 나는 영화를 보듯이 내 고생을 영화를 보듯이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절대 나는 실망을 보면서 실망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언젠가 저 주인공은 해피엔딩이 될 것입니다. 그냥 미군 병사의 그 애정 영화를 볼 때 나는 그것을 느낍니다. 외국 영화들이 참 멋있습니다. 상당히 철학적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말하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슬픔에 나를 참고 견디면 반드시 즐거운 날이 오리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를 우리 젊은이들은 잊으면 안 됩니다. 그 즐거움은 잠깐, 마지막에 인생의 마침표입니다. 그 앞에 나타나는 모든 고통도 즐거워야 합니다. 재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극장에서 아슬아슬한 것도 재밌어 하지 않습니까? 나중에 잘 되면 기분이 좋지만, 그 아슬아슬한 것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