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광대함과 인간 존재의 의미
우주적 관점에서 인간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 우주는 인간이 빛의 속도로 수천만 은하 중 가장 가까운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가는 데 250만 년이 걸립니다. 신인의 본체가 계신 백궁은 빛의 속도로 2,120억 년이라는 천문학적인 시간이 걸립니다. 이럴 때 빛의 속도는 달팽이보다 느리게 느껴질 수 있으며, 속도나 거리에 의미를 두는 것조차 무한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광활한 무한대 우주의 코스모스를 생각하면 인간의 존재는 미물에 불과하고 무의미함과 공허함의 감정이 생기지만, 한편으로는 티끌 모아 태산인 것처럼 지구와 인간이 아무리 작아도 우주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감에 신기루 같은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우주 속 먼지 같은 인간들이 우주적 관점에서 과연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신의 입장에서 인간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천부경으로 본 우주: ‘하나’의 공간
제가 우주를 천부경으로 표현하면 잘 나타납니다. 우주에 아무리 별이 많아도 인간이 사는 별만 362무 88개로 무한합니다. 인간이 사는 별만 해도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등이 이만큼 있습니다. 그 이외의 별은 숫자가 월등히 많지만, 그 숫자는 무의미합니다. 이 많은 숫자가 ‘일(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일(一)’은 다른 말로 ‘공(空)’입니다. 즉, 공간은 이 우주가 하나입니다. 우주가 아무리 별이 많아도 하나의, 여기에 붙은 세균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하나입니다. 이 안에 입자, 전자, 양자 등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우주입니다. 우주에 별이 몇 개가 됐든, 무한대가 됐든, 그것은 하나입니다. 공간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공간을 벗어난 별은 없습니다. 그 공간은 두 개일 수 없습니다. 공간이 쪼개져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별이 많아도 연결된 공간 안에 하나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주를 보는 눈이 강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우주는 그 자체가 하나입니다. 둘일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개체는 무한대의 전자가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 원자, 원소, 전자가 들어 있고, 미시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도 미시적으로 보면 우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 개인가요? 아닙니다. 이 안에 많은 전자가 있고, 원자가 있고, 무엇이 있다 해서 이것이 몇 개로 나눠진다고 계속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하나입니다. 공은 둘이 없습니다. 두 개의 공간이 우주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 안드로메다에 있는 하늘이 여기 하늘과 떨어져 있을까요?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숫자를 개념화하지 말고, ‘일(一)’을 딱 보는 순간에 우주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一)’은 무한대입니다. 그 무한대가 공간을 벗어나서 있는 것은 한 개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주에는 ‘일(一)’이라는 숫자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공간이 두 개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주를 보는 눈은 그런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관천지도: 우주를 하나로 보는 지혜
우리가 우주를 볼 때 이것이 관천지도입니다. 천지를, 하늘을 쳐다볼 때 볼 만한 도가 있습니다. 그 도가 무엇입니까? 우주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둘로 보는 개념을 가지면 안 됩니다. 우주를 관찰할 때, 우리가 이 자체를,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것은 하늘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늘이라면 우주, 은하계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무슨 천, 무슨 천은 필요 없습니다. 경계가 있을까요? 거기에 모든 별이 있는 곳이 다 하나의 공간에 지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이야기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치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우주의 이치에 말입니다. 그래서 ‘일(一)’은 또 어디에 들어가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주를 하나로 생각하면 우리가 마음에 들어와 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우주를 인지할 수 없습니다. 우주가 하나다, 일시무시일이 우리 마음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에는 ‘일(一)’이라는 숫자가 없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꿀 때는 일시무시일을 무위자연이라고 합니다. 자연은 스스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자연스러움과 자연의 무위이화
인간은 자연을 해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부자연스럽게 지하철을 놓고, 철도를 놓고, 땅을 고속도로로 만들며 부자연스러움을 만드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부자연하게 만드는 것을 발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아오고 싶을 때는 과학 문명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 쾌적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특히 나무를 보거나 동물, 산에 꿩을 보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목줄을 만들어 개 자체는 자연입니다. 우리가 ‘연소한다’ 할 때는 ‘연(燃)’이 불에 탄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고기 육(肉) 자입니다. 고기를 불에 태우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다 된 것 같으면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스로 고기를 굽는 것을 자연이라고 합니다. 개고기를 불에 얹어놓고 구울 때 자연스럽게 익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燃)’이라고 합니다. 모든 자연은 무위이화, 즉 건드리지 않아도 그냥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부자연을 만들어 내니 인간이 이미 부자입니다. 우리가 인위적으로 자연을 해치고 있는 것을 과학이라고 하고,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자연은 그 자연 자체를 무의태극이라고 합니다. 태극 음양의 질서에서 자연은 돌아갑니다. 인간이 없어도 그렇습니다. 꼭 인간이 있어야 자연이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연 속에 인간을 갖다 놓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주는 다 하나고 자연적이라고 보면 되는데, 인간의 의미는 좀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신이 직접 만드셔서 갖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우주는 하나, 공간은 영원하다
여러분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우주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공간이 하나입니다. 그 안에 무한대가 있든 우리가 관여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을 통치하는 자가 와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다 가능합니다. 두 개의 공간이 없다는 것, 이것만 생각해도 많이 아는 것입니다. 개수는 무의미합니다. 별이 몇 개든, 하나하나 다 들어 있습니다. 내가 돈을 잃어버렸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우주 공간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은행도 거기 들어 있습니다. 내가 어떤 아내와 이별했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공간 안에 있습니다. 지구별을 벗어나도, 같이 죽었어도 떠날 수 없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이 영원합니다. 이것은 공에 드리는 것입니다.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꼭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우주는 하나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쓸데없이 우주가 은하계고, 하늘은 여기 하나라고 잘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부 일체입니다. 그것을 또 일체유심조라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도 하나를 만듭니다. 마음이 하나라고 해야 하나이지, 마음이 없으면 그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음이 만듭니다. 마음이 그것을 느껴야 하고, 관조해야 합니다.
기능적 우주와 성품적 우주
인간이 스스로 작은 존재라고 느끼지만, 우주와 하나라고 보면 인간도 우주 같은 우주의 일부라고 해야 합니다. 아니, 그 우주를 인간의 마음속에 다 담을 수 있습니다. 하나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다 담을 수도 있고, 무서운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주는 기능적으로 볼 수 있고, 성품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능적으로 보면 우주가 자전, 공전하고, 코페르니쿠스나 지동설을 주장하는 것처럼 우주는 그런 것은 기능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주를 바라보는 눈은 기능적으로 볼 수도 있고, 성품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성품적으로는 그냥 일시무시일, 이렇게 우리가 마음속으로 개념을 줘 버리는 것입니다. 우주는 하나다, 내가 있으니까. 내가 성품적으로 우주는 무엇이다 볼 수 있고, 기능적으로는 저것은 태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로 우주를 볼 수 있습니다. 성품적 우주와 기능적 우주, 우리 마음의 세계가 우주를 관조하는 것입니다. 일체유위법이 영원한 포영이며, 세상의 모든 별이 다, 지구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능적 우주가 아니고 의지입니다. 그것이 영웅함포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일체유위법이 세상에는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이나 모든 법률이나 제도가 꿈같고, 환상 같다고 당연히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 보신 분야, 우주를 성품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별이 몇 개가 있고 무엇이 이런 것을 기능적인 우주를 우리는 성품적으로 분석하는 것입니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합니다. 우주의 기능에 순종하는 자는 살고, “저게 뭐야? 하늘이 어디 있어요?” 하는 자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적선지가에는 필유여경이 필요합니다. 선을 행한 사람의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고, 불선지가에는 필유여앙이 필요합니다. 악을 행한 사람의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온다는 것입니다. 우주를 바로 볼 때 무엇으로 본 것입니까? 성품적으로, 기능적인 우주가 있고, 성품적인 우주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가지는 우주관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나중에 죽으면 지옥 간다는 것이 성품적인 것입니다. 종교가 그런 것을 많이 겁을 줍니다. 선악과, 인과응보, 이런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굴레입니다. 기능적인 것이 있고, 성품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의 질문: 너의 마음은 어떠한가?
저는 너무 기능적으로만 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성품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무 물질이 나무, 에너지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크다고 합니다. 그 세계에 어떻게 보면 성품의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그 창조한 아담을 보고 “아담아, 너가 어디 있느냐?”라고 합니다. 신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네 위치가 어디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지금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느냐는 소리입니다. 방향은 위에서 신이 다 보고 앉아 있습니다. 네가 지금 네 자리에 똑바로 서 있느냐, 네 형을 죽이고. 지 혼자 잘났다고 형을 돌로 쳐 죽이며 나중에 하늘에서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네가 지금 무슨 마음을 먹고 있느냐, 성품적인 것이지 기능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시작된 것입니다. 왜 나를, 내가 뭐 동생 시키는 사람이. 또 성품적인 것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제가 나온 기능적인 인구에는 죄가 없습니다. 지진이 났다면 기능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관여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천재지변에 태평양이 없어지고 대서양만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미국에 가서 붙어 버립니다. 또 우리가 성품적으로도 변합니다. 봄에는 따뜻한 기운이 오고 가을 추석이 되면 사람들이 움츠려들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점점 초조해집니다. 성품적 우주를 우리는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주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고 하듯이 그것이 성품적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많이 와서 그동안 너무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 기준의 잣대로만 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기능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석가모니나 공자는 이런 사람들은 성품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공간 자체를 차원을 달리합니다. 기능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기능은 사건 공이다, 이러고 말입니다. 알아야 합니다.
도덕과 정당한 고통: 성품적 우주의 가치
인간은 도덕에 맞는 것을 합리라고 하고, 도덕이 안 맞으면 불합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기능적 우주에서 지나서 성품적으로는 도와 덕을 따지고, 이 도덕이 안 맞으면 불합리입니다. 그래서 정당한 낙과 정당한 고통을 취하고, 정당하지 않은 고통은 없습니다. 시험 보러 갈 때 열심히 고시방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그것이 정당한 고통입니다. 고통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청년 시절에 공부하는 고통, 그것이 있어야 하는 고통도 정당한 것이 있고, 즐거움도 정당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쾌락을 하면 그 부당한 즐거움도 정당한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내가 지금 돈을 벌어다가 어머니 옷을 한번 사 가지고 어머니 집에, 늙은 어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에 간다면 정당한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남의 것을 도둑질해서 어머니 옷을 사서 간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가 땀 흘려서 정당한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당한 낙이 있습니다. 정권 투자해서 돈 벌어 가지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 성품적 우주는 이런 것을 다 싫어합니다. 그 사람을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정당한 악을 추구하는 자, 정당한 고통을 추구하는 자는 살려주고, 부당한 낙과 부적절한 부당한 고통을 겪는 사람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고통도 정당한 고통을 잘 모시다가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어도 정당한 고통은 우주가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광대무량한 우주와 인간의 마음
광대무량한 세계는 하나입니다. 절대 중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둘도 없고, 우주는 시작이 없고, 둘이 없고, 중심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광대무변하고 강대한 우주를 바라보면 얼마나 우리가 작아집니까? 그런데 작아지지 마십시오. 무슨 우주를 가지면 작아지지 않습니다. 성품적 우주를 보면 작아지지 않습니다. 광막 우주지입니다. 늙고 끝이 없습니다. 그 우주에 있는 나의, 이것이 무슨 말이냐, 이 우주와 나는 이것을 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 마음속에 담을 수 있습니다. 아주 광활하게 넓은, 그런 끝이 없는 우주지만, 그것이 나 하나에 다 들어오고, 남자는 광막 우주 지하를 가져야 합니다. 하늘 위나 하늘 아래입니다. 혼자 있습니다. 혼자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유할 것이 없습니다. 다 가져 버렸으니까. 누구나 그 우주는 자기 마음대로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몫까지 가져가지 마라, 이럴 수가 있습니까? 높은 섭리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인간 영혼의 목적: 백궁천국
지구 인간들은 신임을 알아 고치고, 인간 영혼들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다면, 신인님은 내일을 돕는 것이고, 대권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백궁천국에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유럽 여행 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자기 것이라는 것을 백 번 가면 다 우주가 관망 우주 지하라는 것을 압니다. 스웨덴을 먹으면 무엇합니까? 인도를 먹으면 무엇합니까? 영국이 인도에 사람들도 먹고살아야 합니다. 결국 인도 사람들이 사는 땅을 내 땅이라고 먹으면 영국이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군대에 폭동이 일어납니다. 골치 아픈 식민지, 그것은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그래서 깨닫게 되면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전쟁을 했습니다. 그 영토 전쟁이 바보 같은 짓입니다. 국민들이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원나라가 점령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먹고살고 있는데.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권리만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시대는 어리석은 땅을 욕심내는 것입니다. 그 땅에 사는 미국은 가서 아메리카 인간을 막 죽여 버리고 땅을 뺏었지만 언젠가는 주겠지요. 결국 백궁이 중심이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와 덕을 기르는 것은 땅에 살기 위해서는 차원이 내가 내는 것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