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Huh Kyung Young’s Profound Interpretation of Original Sin and the Tree of Knowledge: A Journey into Self-Reflection and Conscience – August 22, 2024

에덴동산의 재해석: 마음속 성찰의 공간

원죄와 선악과에 대한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성경 창세기 2장 16절에 따르면, 여호와 하나님이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를 어기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이는 아담과 이브가 불사의 몸이었다가 선악과로 인해 죽는 육체가 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태초부터 하늘이 인간의 행동에 허락하는 부분과 허락하지 않는 부분을 명확히 구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덴동산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에덴동산이며, 그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성찰입니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성찰이라 하고, 남을 보는 것은 관찰입니다. 성찰을 통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 에덴동산이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내면에 에덴동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러한 해석이 없으니 많은 기독교인들이 에덴동산이 어딘가에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비손강이나 유프라테스강은 실제 우리의 동맥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가슴에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성찰이며, 성자가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입니다. 그 자를 발견했을 때 가지는 마음이 양심입니다. 양심을 가지지 않은 것은 자신을 성찰하지 않은 것입니다. 양심을 찾아내면 자기라는 존재를 알아낸 것이며, 이것이 바로 ‘덴’입니다.

선악과와 자유의지: 선과 악의 선택

양심을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면 악한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타인을 관찰하는 것이 악이고,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선입니다. 선과 악을 따먹지 말라는 것은 선이든 악이든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남을 관찰하면 비평과 부정적인 악이 나오지만, 자신을 성찰하면 양심이라는 선이 나옵니다. 선악과는 남을 관찰하는 악과, 자신을 성찰하는 선과를 의미합니다.

우리 몸 안에는 선악과 나무뿐만 아니라 생명나무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는 이 두 가지를 자유자재로 판단하라는 어마어마한 유산입니다. 자유의지를 주었기에 선악을 따먹지 말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동차 열쇠를 주면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쇠를 주지 않으면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자동차를 주면서 열쇠를 주는 행위, 즉 자유의지를 주는 행위가 바로 선악과와 같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성찰이며 선이고, 남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관찰이며 악입니다. 성찰을 통해 자기 내부에서 자신과 대화하며 느끼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을 알아내는 것이 선입니다. 에덴동산인 우리 가슴속에 두 나무가 있는 것입니다. 책임을 남에게 돌리면 악과이고, 자신에게 돌리면 선과입니다.

뱀의 유혹과 원죄의 본질

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한 것은,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로 인간이 신에게 대적하려는 죄를 짓게 한 것입니다. 자신을 성찰하여 양심을 가지면 그렇게 하지 않지만, 성찰하지 않고 관찰만 하면 악을 가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만 관찰하고 자신의 내면은 돌아보지 않는다면, 남의 비리만 보게 됩니다. 자신을 성찰하여 양심을 만나야 합니다. “내가 너무하는 거 아니야?”와 같은 양심의 소리가 들릴 때, 우리는 선악과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은 나 자신의 자유의지 동산입니다.

생명나무는 모든 생명이 귀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처 입은 풀잎이나 반쪽만 남은 꽃잎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미소 짓는 것을 보며, 우리가 자연을 해치는 것에 대해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으며, 모두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값싼 석면 브레이크 라이닝을 사용하여 많은 생명을 폐암에 걸리게 하는 것은 생명나무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자기 돈 조금 아끼자고 많은 생명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풀잎을 보고 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생명들이 흔들거리는 동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가 우리 가슴에 심어져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과 에덴동산의 구조

창세기는 인간을 만들고 인간의 가슴에 동산을 넣어준 것입니다. 심장이 가운데 있고, 왼쪽 폐와 오른쪽 폐는 생명나무이며, 양심은 선악과 나무입니다. 폐 두 개와 콩팥 두 개처럼 우리 몸은 두 개씩 세트로 되어 있는 부분이 생명나무를 상징합니다. 간이나 심장, 위장, 대장, 소장은 하나입니다. 우리 몸 전체, 뇌 자체도 에덴동산입니다. 뇌에는 선악과를 따먹는 이성이 들어 있습니다.

자신을 성찰할 때는 ‘자의 렌즈’, 즉 자신을 보는 안경을 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는 ‘관찰의 망원경’을 끼고 다닙니다. 그러면 남의 단점만 보이고, 결국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택한 사람이 되어 망하게 됩니다. 창세기에서 이것을 설명했지만, 어떤 목사도 이를 알지 못합니다. 물질적인 에덴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내면 에덴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관찰의 렌즈를 끼면 전부 안 좋은 것만 보이고, 오감을 자극하는 것만 보이며, 결국 타락하고 나쁜 짓을 하게 됩니다.

성찰의 중요성과 양심의 발견

자신의 내부를 돌아보며 이 몸이 얼마나 갈 것인지, 무엇을 넣어줘야 제대로 지탱할 것인지 성찰해야 합니다. 휘발유 차에 디젤을 넣으면 매연이 나와 남에게 환경 오염을 뿌리고 결국 병원 신세를 지는 것과 같습니다. 성찰의 안경, 즉 자신을 돌아보는 안경을 껴야 합니다. 밖으로 보이는 안경만 끼고 있는 것이 바로 ‘과’입니다. 성찰의 안경을 껴야 도인의 경지에 이릅니다. 관찰의 안경을 낀 사람은 아무리 고고학자라 해도 인간 쓰레기입니다. 돌멩이 연구하는 것일 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부를 찾아내야 합니다.

자기와 대화하는 것을 성찰이라 하고, 그 대화에서 최종적으로 느끼는 것이 양심이며, 이것이 선입니다. 양심이 찔려야 합니다. 오늘 하루 인류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자식에게 책 한 권을 읽어준 적이 있는지, 따뜻하게 만지고 대화한 적이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출장 갔다 왔는데 딸이 울면서 보고 싶었다고 하는 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위해 성찰하며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아빠 목소리만 들으면 엄마에게 소리 지를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는 정신병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항상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성찰의 안경을 끼고 자기 쪽으로만 보여야 합니다. 모든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해외 출장 갔을 때 아내와 딸이 울면서 그리워한다면, 그 아버지는 성공한 사람이며 성찰하는 사람입니다.

원죄의 진정한 의미: 자유의지의 책임

우리는 너무 성찰하지 않고 관찰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훌륭한 아버지인지, 우리 자식이 훌륭한 자식인지 관찰만 합니다. 내가 잘해줘야 합니다. 술 마실 시간을 줄여 자식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식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성찰과 양심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은 각자 가지고 있는 우주입니다. 모든 사람이 성찰하고 양심적이라면 이 세계는 낙원이 될 것입니다. 관찰의 안경을 끼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찰의 안경을 끼고 자기 내면 세계를 봐야 합니다. 그러면 양심이 보이고, 모든 사람이 나에게 피해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남과의 다툼이 없어집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원인은 원죄 때문이 아니라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동차 열쇠를 주지 않을 수 없듯이,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통사고를 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교통사고를 바라보는 성찰이 중요합니다. 자유의지라는 열쇠를 개인에게 맡겨 버렸기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남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안경을 끼고 보면 남과 다툴 일이 없습니다. 안티들에게 모함을 받아 재판을 받더라도, 자신을 돌아보며 다음에 이런 일이 없도록 그들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남의 것을 노리는 관찰의 안경을 끼고 있는 것입니다.

성공의 3대 원소는 피와 땀과 눈물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 없이 성공하려 한다면 도둑입니다. 남의 피와 땀과 눈물로 이룬 것을 공짜로 가져오는 것이 죄입니다. 원죄는 인간이 만들어질 때부터 넣어 놓으신 선악과, 즉 우리의 자유의지입니다. 자유의지가 죄의 안경을 낄 수도 있고 선의 안경을 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현대차 사고가 났다고 현대차 회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악도 택하게 하고 선도 택하게 했는가, 이것이 창조자와 인간 사이의 원죄입니다. 열쇠를 준 것이 원죄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오토바이를 주어 사고가 나면, 부모는 자신이 오토바이를 준 것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과 인간의 원죄 관계는 자유의지를 심어주면서 맺어진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오류와 종교의 본질

기독교나 다른 종교들은 원죄, 에덴동산, 선악과, 생명나무의 진정한 의미를 모릅니다.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비유법입니다. 최초로 만든 인간이 법을 어기고, 형제가 동생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신이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을 돌팔이로 만드는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축복(blessing)의 어원은 피(blood)에서 파생된 것으로, 피로서 맹세하고 피로서 준 것이 축복입니다. 신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전부 넌센스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을 수세기 동안 숨겨왔고, 번역하는 사람들을 화형에 처했습니다. 성경이 번역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카톨릭은 힘을 잃었습니다. 성경은 로마 공회에서 370번 이상 고쳐졌습니다. 노틀담 사원은 원래 절(temple)이었고, 유럽의 모든 성당은 이름이 절이었습니다. 예수가 최초로 가졌던 종교는 불교였으며, 인도에서 불교를 가지고 이스라엘로 갔다가 유대교의 박해를 받고 예수교가 된 것입니다. 불교의 염불 끝에 나오는 ‘옴’은 기독교의 ‘아멘’과 같습니다. 예수가 인도에 갔다 왔기 때문에 불교의 염불을 사용한 것입니다.

예수는 윤회 사상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는 다른 종교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종교입니다. 다만 예수가 개입된 기독교는 에너지가 있고, 개입되지 않은 불교는 에너지가 없습니다. 불교의 정각, 열반, 해탈, 보리, 반야, 삼매, 무아, 성불 등은 에너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기도, 구원, 축복, 성령, 은사, 부활, 영생, 천국은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내가 전 세계 종교의 주축에 있으며,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사를 무한정 데려와 나누어주고, 축복을 주면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합니다.

성찰과 양심: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

자신을 관찰하는 것을 성찰이라 하고, 남을 관찰하는 것을 관찰이라 합니다. 자기와 대화하여 자신을 찾는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자기와의 대화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남과의 대화에서는 자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돈 보따리를 발견했을 때, 불교식으로 생각하면 인연에 의해 복이 왔다고 생각하여 주인을 찾아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식으로 생각하면 이 보따리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라 여기고, 잃어버린 사람의 애통함을 헤아려 경찰서에 갖다 줍니다. 이것이 성찰하고 양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것입니다.

장애아를 낳았을 때, 불교식으로 생각하면 전생의 인연이나 업보로 여기지만, 기독교식으로 생각하면 이 아이를 통해 자신을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라 여깁니다. 이 아이는 나의 스승이며, 나를 방탕한 길로 가지 않게 인도해 주는 천사입니다. 예수는 장님을 보고 “하늘의 영광을 보이려고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장애아를 통해 겸손해지고, 세상일에 달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귀하게 받아들이며 떳떳하게 키우겠다고 생각하면 복이 들어옵니다. 장애아를 미워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와 대화하는 것이 성찰이며, 불교의 참선과 같습니다. 장애인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정진할 수 있는 화두이자 천사가 온 것입니다. 열심히 보살피고 노력하면 그 복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오히려 그 장애아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되고, 죽을 때 “내가 행복했구나, 너 때문에”라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하늘의 영광을 바치려고 준 것”입니다. 장애아들이 자존심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동차 키를 자녀에게 주신 것처럼, 신이 인간에게 에덴동산이라는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그것을 맘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신 부모님을 생각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신인이 직접 나타나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해주고, 모든 열쇠를 주었지만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