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Huh Kyung young’s Insights on India, Cows, and the Illusion of Reality – July 4, 2022

신과 소, 인도와 힌두교의 상징적 연관성

오늘 신과 소, 그리고 인도와 백궁의 관련성에 대해 질문드리겠습니다. 신은 소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많으신데, 예언서 등에서 성산, 성지, 우명지, 무성, 죄라, 시노부 등으로 언급되었고, 신의 띠는 소띠이며 목소리도 소 울음소리 같습니다. 또한, 소를 숭배하는 인도와 관련 있는 허씨이시고, 신의 강연 중에는 “내 꿈과 가장 비슷한 종교는 힌두교”라고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인도 사람들이 신을 빨리 알아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신과 백궁, 인도와 힌두교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인도와 소는 큰 연관이 있습니다. 불경이나 힌두교 같은 성경에 나오는 소 이야기는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소설은 우리가 말하는 작은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소설이 대선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목적은 사람들이 자유, 돈, 땅, 동물, 이름 등 모든 것에서 돈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연봉으로 가치를 매기며, 불경이나 대선에서 말하는 많은 것들은 결국 영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의 목적과 영혼의 영원성

인간의 목적은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유교나 공원을 추구하는 불교는 인간의 목적이 잘못된 것이며, 하늘로 간다는 기독교 역시 목적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소설은 작은 이야기입니다. 전생과 연관된 인간의 습관은 땅의 이야기이지, 하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백궁이나 천국은 별개의 세계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애초에 ‘공’에서 왔다거나 ‘무’에서 왔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영원히 전부터 여러분은 존재하는 존재이며, 지구 생명과 수명과 함께 없어지지 않습니다. 60년 전에는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우주를 돌고 도는 것이 인간의 영혼입니다. 영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의 제약 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또 인간으로 어느 미래에 지구에서 태어나고, 지구가 없어지면 다른 별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영혼은 부품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구불변합니다. 모든 개인의 영혼은 평등하며, 어떤 생명체든 평등합니다. 평등하지만 그 사람들의 수행은 각자 다릅니다. 지구에 있는 사이클은 각자 다르지만 빨리 갈 수도 있고, 빨리 와서 빨리 갈 수도 있습니다. 영혼의 사이클은 짧고 길 수 있지만, 그 자체는 무궁무진하게 수명이 끝이 없습니다.

종교와 시간의 노예, 그리고 초종교의 차원

결국 종교는 시간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초종교는 다릅니다. 초종교는 시간과 공간과 거리와 온도와 중력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무차원, 즉 차원이 없는 것입니다. 소가 비유되는 것은 비유법일 뿐, 소 자체가 꼭 흙에 비유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는 세 가지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소는 희생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희생할 때 소 우(牛)자를 쓰고, 희생 제(牲)자에도 소 우(牛)자가 쓰였습니다. 둘째, 소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목사(牧師)는 소의 아버지라는 의미입니다. 희생이나 남을 가르칠 때는 소 우(牛)자를 씁니다. 셋째, 소 울음소리를 냅니다. 우명재(牛鳴在)는 소 울음소리가 전 세계에 퍼진다는 의미입니다. 언젠가 허경영의 울음소리가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권능을 가진 자, 말에 권능을 가진 자, 마음에 권세를 가진 자는 오직 나뿐입니다. 나는 모든 것의 원인을 가지고 있는 자, 즉 원인자입니다. 원인자이면서 시원자, 최초로 시작한 자입니다. 그러면서 또 근원자입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최초는 영원히 전입니다. 시간이 존재하기 전입니다. 여러분의 생명도 시간이 존재하기 전부터 영원히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번식한 것입니다.

인간의 족보와 영적 정맥

우리 족보는 짧습니다.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분이 나에게 선배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무적족으로 많이 찍어낸 신입니다. 인간의 족보는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족보를 구성해 놓으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식으로 피라미드처럼 사람 수가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한 명으로 압축됩니다. 최초의 한 사람으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영적으로 정맥 해주는 것입니다.

선악과와 인간의 부끄러움, 그리고 상징성

여러분들이 상징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동산을 만들어 놓고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두었습니다. 생명나무는 따지 말라고 했지만, 동산 중앙에 두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그것을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먹음직스럽게 생겨서 따 먹었습니다. 따 먹기 전까지는 발가벗고 다녔지만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뱀이 나타나서 “저것을 따 먹으면 너희 아버지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자가 어떻게 뱀에게 꼬임을 당할 수 있을까요? 이길 수 있는 유전자가 있지 않았을까요? 뱀에게 꼬여서 그것을 따 먹었습니다. 따 먹고 나니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 발가벗고 나타나는 것이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따 먹은 다음에 생긴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데,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말입니다. 부끄러운 것이 아니면 선이고, 부끄러우면 악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니 나무 이파리로 가렸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아랫도리를 가렸는데, 이 잎이 말라 비틀어져서 부서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양을 잡아 양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었습니다. 양이 자기들의 죄를, 허물을 완전히 가려준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로 만든 옷보다 오래 입을 수 있습니다. 양가죽은 예수의 가죽입니다. 예수를 덮어쓰면 죄가 없습니다. 이것이 왜 예수를 이름 가지고 앞에 가지고 오면 죄가 없어진다는 논리입니다.

종교의 차원과 신의 영역

이러한 원리와 불교 원리를 볼 때, 이것이 얼마나 수준 낮은 이야기인지 알 수 있습니다. 차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1차원, 2차원적인 사람이 3차원, 4차원적인 사고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초차원으로 들어가야 신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2차원 방정식입니다. 결국 나중에 인간의 죄와 허물을 선악과 잎으로 못 가리고, 예수가 나타나서 예수의 피로써 가린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말하는 요점은 선악과, 무화과나무 잎, 양의 피 같은 것들은 상징성일 뿐입니다. 여러 종교들이 이해하기 쉽게 상징성을 부여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추상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것이 있어야 합니다. 추상적인 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인간이 뻔히 상상해 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의 영역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원자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원자가 쪼개지고 폭발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라늄에서 원자가 분열하여 폭발할 때 나오는 삼중수소는 사람을 녹여 버리고 DNA를 파괴하며 타버리게 합니다. 인간들이 겪어보지 않고 이런 식으로 원자를 알게 되는 것과 실제 원자탄을 만들어 본 것은 다릅니다. 나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를 보여줍니다. 한문에는 유교, 도교, 불교 등 모든 종교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내가 이끄는 것은 이것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2차원의 밖에 있는 것을 말로써 여러분에게 3차원적인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나입니다.

인간 가치의 허상과 영혼의 본질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가치는 영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짜리 작품일까 생각할 때, 인간의 존재, 대사, 행위가 나와 존재를 알면 행위가 나오고, 행위가 나오면 치유할 수 있습니다. 행위를 해야 치유됩니다. 인간의 존재는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상품의 가치와 같이 보고 있습니다. 나치 수용소에서는 인간의 가치가 있는 것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수용소에 10만 명을 모아놓고 화장실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나치 수용소의 특징은 화장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방에서 대변을 보게 했습니다. 몸 전체가 배설물로 뒤덮여 인간의 가치가 돼지처럼 훼손되었습니다. 썩은 커피를 한 잔씩 주는데, 그 커피를 먹지 않고 세수를 해야 했습니다. 세수를 해도 얼굴은 시커멓고, 서재원 임무도 있으니 커피로 씻어야 했습니다. 왜 화장실을 안 만들어 인간의 가치를 낮추었을까요? 정상적인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히틀러의 지시로 그 사람들의 가치를 낮추어 동물이 되게 한 것입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동물처럼 화장실을 안 만들었으니 구석구석 대변 투성이였습니다. 그 냄새와 오물 속에서 그들이 지내니 살아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만 해도 그들은 치욕적이고 차라리 죽음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놓고 나중에 죽일 때는 동물을 죽이는 것이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가치를 변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화장실은 히틀러의 지시로 안 만들어졌지만, 이탈리아 심리법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적인 복수를 한 것입니다. 경찰서 유치장이나 감옥에 화장실을 안 만들어 주면 민주주의가 멀었다는 소리가 나오지만, 그들은 무시합니다. 조사관 앞에서 대변을 봐야 하고, 소변을 봐야 합니다. 계속 쌓입니다. 거기서 인간들이 서로 싸우면서 살겠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이 너무나도 비참한 것입니다. 가치를 훼손해 버리면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소설이 됩니다. 존경하던 사람들이 전부 배설물에 덮여 있으니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존경이라는 단어가 인간에게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연이 여러분의 배설물을 치워주고 화장실이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개 취급을 당하면 인간의 가치가 돼지처럼 돌아오고, 돼지를 표백하면 인간의 천일 비행을 퍼뜨려 독이 오릅니다. 실제 인간들의 세계는 문화 시설이 없을 때는 그냥 동물 시대였습니다.

문명의 주기와 착시 현상

불과 사람 모습을 갖추고 이렇게 산 지는 5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지구 역사는 70억 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12만 년마다, 13만 년마다 한 번씩 원시 시대가 되었다가 문화 시대가 되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말로 해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종교 자체는 철학의 영생이 없으니, 철학은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은 명답일 수는 있어도 정답은 아닙니다. 철학과 종교는 정답이 아닙니다. 정답은 이렇습니다. 유리컵에 젓가락을 넣어보면 젓가락이 휘어 보입니다. 왜 젓가락이 휘어 보일까요? 똑바로 있는데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빠집니다. 사람들은 유리컵 안에 젓가락이 휘어 보이는 것을 보고 인생이라고 보고, 왜 소자가 붙었는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영어로 착시 현상, 버티고 이펙트라고 합니다. 이것을 가시 효과라고 합니다. 비타민을 감기약이라고 속여 주면 더 빨리 낫습니다. 실제 감기약은 더 오래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몸이 그렇게 비타민을 감기약으로 의사도 속입니다. 약사가 속이면 환자는 겁을 먹고 몸이 빨리 낫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플라시보 이펙트, 가짜 약 효과라고 합니다. 우리 초등학교 때 학교 운동장이 무제한으로 넓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다시 초등학교에 가보니 운동장이 짧기만 합니다. 우리가 착시 현상을 겪은 것입니다. 잠실 주경기장을 어릴 때는 무지하게 넓게 보았지만, 나이 들어 가보니 작아 보입니다. 왜 작아졌을까요? 착시입니다. 그것이 버티고 이펙트, 플라시보 이펙트입니다. 그리고 대표적인 것이 피그말리온 이펙트입니다. 이것은 ‘바라봄의 법칙’ 현상입니다. 이것도 착시입니다. 맹모삼천지교처럼 바라보면서 아이들을 키우니 공부도 잘하고 여러 가지 장관도 되는 것입니다. 학교 앞에 갔더니 착하다고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바라봄의 법칙대로 아이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입니다. 학교가 공부만 하는 곳은 아닙니다. 버티고, 플라시보, 피그말리온은 모두 착시 현상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세계가 전부 가상 공간, 가상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지금 착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에게 알려서 이 하늘의 백궁 체계를 알려주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마치 김치 맛을 글자로 설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는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 제일 남쪽 된 것입니다. 영어로 번역 안 되는 시는 한글밖에 없습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는 영어로 번역할 수 없다고 합니다. 영문학자들이 “즈려밟는다”는 말을 영어로 번역하지 못합니다. 우리말로는 “살짝 이렇게 즈려밟고 간다”고 하면 이해가 가지만, 영어로 하면 무슨 손보고도 아니고 이상합니다. “사뿐히”라는 말도 어렵습니다. “가시옵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영문으로 번역할 수 없는 것이 시입니다. 그런 세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번역해 내라고 하면 문장이 낭만이 없습니다. 우리 언어처럼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고 하면 그 향수가 잎사귀처럼 느껴지는데, 영어로 번역하면 어떤 영문학자도 번역을 못합니다. 형식이 안 됩니다. 한국말이 이렇게 차원이 높은데, 하늘의 백궁 언어를 혀로 반대 이야기해서 이것이 통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여러분들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이 시를 세계 어떤 영문학자도 번역을 못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감정을 이렇게 미묘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한국 사람의 감성은 가요가 세계로 퍼져나갑니다. 빅뱅이나 다른 가수들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나의 언어가 취하는 역할과 힘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백궁은 여러분에게 설명할 때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를 최고 과학자들이 번역을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느낌이 우리처럼 아름답지 않습니다. 번역해 놓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가지고 사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언어를 가지고 아무리 하더라도 백궁의 세계를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달짝지근하다고 할 수도 없고, 쌉쌀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오묘한 어머니의 된장 맛은 약간 매운맛도 있고, 멸치 맛도 있고 온갖 맛이 있을 텐데, 이것을 어떤 맛이라고 한마디로 단어로 번역할 수 없습니다. 된장 맛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운맛도 아니고, 담백한 맛도 아니고, 쓴맛도 아닙니다. 한국어에는 쌉쌀하다, 달짝지근하다는 말도 영어에는 없습니다. 한국말은 예술입니다. 이것이 번역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나에게 질문하지만, 내가 다 답해주지만, 정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내가 보여줍니다. 그것을 예상하면 안 됩니다. 현대 과학에서 이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내 사진을 붙이면 우유가 치즈로 바뀌는 것을 현대 과학자들이 표현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됐는지 결과는 알지만 원인을 모릅니다. 지구가 왜 창조되었는지, 왜 여러분들이 나왔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짜 공부해야 할 것은 “나는 누구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최고의 원죄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이 지구에 와서 얻어야 할 마지막 패션입니다.

인간의 가치와 존재 이유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려는지도 모르면서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은 얼마짜리다, 저것은 얼마짜리다 하며 돈으로만 봅니다. 사람을 보면 연봉으로 봅니다. 다 이렇게 바라보는 곳이 피폐한 세계입니다. 이리 떼 속에 강아지를 갖다 놓은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험악한 이리 떼 속에 내가 어디서 왔느냐 이것을 주장하면서 내가 어디로 가느냐 이것을 찾는 명예를 찾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이리 떼 속에 있는 토끼와 같습니다. 순수한 사람이지, 어느 이리가 잡아먹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것이 그렇습니다. 힌두교가 백궁에 가깝다고 하는 것은, 가깝다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그 사람들은 자연히 신을 보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가치입니다. 멀지만 그나마 가깝습니다. 자연이 자체에 내 사진이 통합니다. 우유도 통합니다. 모든 물질과 소통합니다. 그 물질 자체가 신의 재물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물질을 숭배합니다.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그들이 변합니다. 소가 이래 주고, 담대하고, 짐을 실어 날라 줍니다. 인도에서 볼 때는 소의 뿔도 쓰고, 아주 희생의 신의 대지로 와서 인간들에게 도움을 줍니다. 소를 행위적으로는 신과 같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월급을 안 받습니다. 소가 풀밭에서 먹고, 인간이 만든 음식을 굳이 안 먹어도 됩니다. 소는 묵묵히 일해 줍니다. 욕심이 없는 그 소를 신의 상징물로 생각하지만, 범신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의 분신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백궁에서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모든 것과 대화가 됩니다. 지금 우리 젊은이가 질문한 것은 간단한 것 같지만 무시무시하게 긴 명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백궁을 단술로 이야기해 버리면 답이 되어 버립니다. 우명성지가 무엇이냐? 소 울음소리를 내는 자가 어떤 특정한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지가 소가 점쟁이들 자리입니다. 우성재는 무엇이냐? 그 사람이 거기서 말을 해서 전 세계로 영토가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 이유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온 존재 이유를 10만 대가 설파해 주는 것이 우명성지이며, 내가 존재하는 곳이 우명성지입니다. 이렇게 존재 이유와 존재의 가치와 존재 목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왜 왔고 어디로 가서 우주를 관리할지 모르고 세월아 네월아 시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명답을 가지고 이 지구로 설파해 주려면 성자들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이것은 허공의 메아리입니다. 내가 이야기해 주는 것이 마지막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내가 시원자, 최초 시작하는 자이며, 근원자, 창조자입니다. 시작을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도 좀 더 어려운 질문을 가지고 오십시오. 철학과 종교는 내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보여줘야 합니다. 나는 그것을 보여줍니다.